최서 묘지명
국립중앙박물관
원본 해상도 2251 * 3000
笑軒居士墓誌
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版圖判書文翰學士致仕崔瑞墓誌
大德九年乙巳二月十日丙戌, 公卒. 二十八日, 葬于松林縣地大德山南麓, 禮也.
公諱瑞, 字夢其, 安西人也. 王考諱淳, 官至朝散大夫尙書戶部侍郞. 故王祖諱洪胤, 位至金紫光祿大夫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兵部事, 贈諡景文公. 卒王祖考金紫光祿大夫檢校大傅守司空中書門下侍郞平章事上柱國, 贈諡靖順公灌. 卒母任氏, 封定安郡夫人, 考尙書都官郞中國學直講絪壽. 故此公之家世也.
公不以綺紈爲心, 氷淸水潔, 恬淡剛明. 甲寅春, 初得官於江華判官, 是年擢第. 乙卯冬, 調延陵直. 丙辰秋, 爲秘書校勘. 中統元年, 出爲處仁縣令. 四年十二月, 入作大官丞, 仍帶式目錄事. 至元六年, 佐幕於北界, 先知有變, 航海如京, 扈駕於燕都. 七年, 還國, 拜犀▨, 入烏府. 八年, 遷右正言知制誥. 九年, 以禮部員外郞, 爲甫州副使, 旣而移忠州判官, 秩滿, 爲閤門通事舍人. 十二年秋, 以工部員外, 出按交州道, 遷版圖佐郞. 十三年, 拜殿中侍史. 十五年秋, 以典理佐郞, 出按全羅道, 十月, 拜秘書丞. 十六年春, 中舍郞知制誥, 出按慶尙道. 十八年, 爲僉議典書知制誥. 十九年春, 出爲東界安集使, 八月, 朝散大夫版圖摠郞, 出守安東大都護府.
二十三年, 以朝顯大夫試典法摠郞知制誥, 復命. 二十四年春, 以典理摠郞知制誥, 出按忠淸道, 六月, 拜朝奉大夫大府▨▨▨▨▨▨, 九月, 遷右司議大夫, 十二月, 充史館修撰官. 二十五年, 以左司議, 帶寶文署直學士. 二十七年, 窮寇入境, 以中烈大夫左司議寶文學士知制誥, 出▨▨▨▨▨揮使. 二十八年, 爲榮烈大夫判大府事. 二十九年, 遷正獻大夫判秘書事膺善府左詹事. 三十一年, 皇帝有命, 以耽羅復爲我土. 分符之始, 實難其人, 公受命往, 諧克復古風.
元貞二年, 以鴻樞懸車. 自號笑軒無著居士, 常誦金剛經, 日修淨業, 享年七十三, 終于家.
凡從仕已來, 以廉平爲己任, 中外賢勞, 東西惟命, 終始一節, 茂著聲績.
始娶秘書監閔徽之女, 生四男, 皆早逝. 後娶密直副使軍簿判書上將軍朴琈第三女, 恭謹貞淑, 德協閨門, 有四男二女. 一男仲濡, 左史郞知內旨, 材器穎異. 二男晶悟, 出家. 三男仲滋, 延德宮錄事. 四男元貴, 出家. 一女嫡入近侍護軍金倫, 都僉議參理集賢大學士同修國史上將軍文愼公金賆之子, 大有吏幹. 二女嫡廣平府典僉趙文瑾, 副知密直上將軍趙抃之子, 有學業. ▨▨位不稱德者有後, 公其終有後乎.
族弟, 三司摠郞知內旨林仲▨題.
銘曰. 崔爲顯姓, 世著文聲. 支分族盛, 門戶▨▨. ▨▨▨▨, ▨▨▨▨. ▨▨▨▨, 令聞有繼.
소헌거사(笑軒居士) 묘지(墓誌)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판도판서 문한학사(奉翊大夫 副知密直司事 版圖判書 文翰學士)로 치사(致仕)한 최서(崔瑞) 묘지(墓誌)
대덕(大德) 9년 을사년(1305) 2월 10일 병술일에 공께서 돌아가셨다. 28일에 송림현(松林縣) 땅의 대덕산(大德山) 남쪽 기슭에 장사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공의 이름은 최서(崔瑞)이고, 자는 몽기(夢其)이며, 안서(安西) 사람이다. 아버지 최순(崔淳)은 관직이 조산대부 상서호부시랑(朝散大夫 尙書戶部侍郞)에 이르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최홍윤(崔洪胤)은 지위가 금자광록대부 수태보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병부사(金紫光祿大夫 守太保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兵部事)에 이르렀고, 추증된 시호는 경문공(景文公)이다.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는 금자광록대부 검교태부 수사공 중서문하시랑평장사 상주국(金紫光祿大夫 檢校太傅 守司空 中書門下侍郞平章事 上柱國)으로 추증된 시호가 정순공(靖順公)인 최관(崔灌)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임씨(任氏)는 정안군부인(定安君夫人)에 봉해졌는데, 그 아버지는 상서도관낭중 국학직강(尙書都官郞中 國學直講)이었던 임인수(任絪壽)이다. 이것이 공의 가세(家世)이다.
공은 고운 비단[綺紈]을 마음에 두지 않고, 얼음같이 맑고 물같이 깨끗하였으며, 담박하고 강직하고 명민하였다. 갑인년(1254) 봄에 처음으로 강화판관(江華判官)의 관직을 얻었고, 그해 과거에 발탁되었다. 을묘년(1255) 겨울에 연릉직(延陵直)에 임명되었다. 병진년(1256) 가을에 비서교감(秘書校勘)이 되었다. 중통(中統) 원년(1260)에 처인현령(處仁縣令)이 되어 나갔다. 〈중통〉 4년(1263) 12월에 〈개경으로〉 들어와서 대관승(大官丞)이 되었으며, 아울러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대하였다. 지원(至元) 6년(1269)에 북계(北界)의 좌막(佐幕)이 되었는데, 변고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바다를 건너 서울로 가서 연도(燕都)로 가는 어가를 호종하였다. 〈지원〉 7년(1270)에 고려로 돌아와서 서▨(犀▨)를 받고 오부(烏府)에 들어갔다. 〈지원〉 8년(1271)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옮겼다. 〈지원〉 9년(1272)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서 보주부사(甫州副使)가 되었다가 얼마 후 충주판관(忠州判官)으로 옮겼다. 임기가 차자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이 되었다. 〈지원〉 12년(1275) 가을에 공부원외(工部員外)로서 교주도 안찰사(交州道按察使)로 나갔다가 판도좌랑(版啚佐郞)으로 옮겼다. 〈지원〉 13년(1276)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다. 〈지원〉 15년(1278) 가을에 전리좌랑(典理佐郞)으로서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나갔다가 10월에 비서승(秘書丞)이 되었다. 〈지원〉 16년(1279) 봄에 중사랑 지제고(中舍郞 知制誥)가 되어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나갔다. 〈지원〉 18년(1281)에 첨의전서 지제고(僉議典書 知制誥)가 되었다. 〈지원〉 19년(1282) 봄에 동계안집사(東界安集使)가 되어 나갔다가, 8월에 조산대부 판도총랑(朝散大夫 版啚摠郞)이 되었으며,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의 수령으로 나갔다.
〈지원〉 23년(1286)에 조현대부 시전법총랑 지제고(朝顯大夫 試典法摠郞 知制誥)로서 복명(復命)하였다. 〈지원〉 24년(1287) 봄에 전리총랑 지제고(典理摠郞 知制誥)로서 충청도안찰사(忠淸道按察使)로 나갔다가, 6월에 조봉대부(朝奉大夫) 대부(大府)▨▨▨▨▨▨에 제배되었으며, 9월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옮겼고, 12월에 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이 되었다. 〈지원〉 25년(1288)에 좌사의(左司議)로서 보문서직학사(寶文署直學士)를 겸대하였다. 〈지원〉 27년(1290)에 궁핍한 도적이 국경으로 들어오자 중렬대부 좌사의 보문학사 지제고(中烈大夫 左司議 寶文學士 知制誥)로서 ▨▨▨▨▨휘사(揮使)가 되어 나갔다. 〈지원〉 28년(1291)에 영렬대부 판대부사(榮烈大夫 判大府事)가 되었다. 〈지원〉 29년(1292)에 정헌대부 판비서사 응선부좌첨사(正獻大夫 判秘書事 膺善府左詹事)로 옮겼다. 〈지원〉 31년(1294)에 황제가 명을 내려 탐라(耽羅)를 다시 우리 땅으로 삼게 하였다. 처음 부절(符節)을 나누는데, 실로 그 적임자를 〈구하기〉 어려웠으나 공이 명을 받고 〈탐라로〉 가서 옛 풍속을 온전히 복구하였다.
원정(元貞) 2년(1296)에 홍추(鴻樞)로서 관직에서 물러났다[懸車]. 자호(自號)를 소헌무착거사(笑軒無著居士)라고 하고, 항상 『금강경(金剛經)』을 읽으며 날마다 정업(淨業)을 닦다가, 향년 73세로 집에서 돌아가셨다.
무릇 벼슬한 이래 청렴함과 공평함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에서 어질게 노력하였고, 동쪽과 서쪽에서 오직 왕명에 따랐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한결같이 하였으니, 명성과 공적이 무성하였다.
처음 비서감(秘書監) 민휘(閔徽)의 딸과 혼인하여 네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후에 밀직부사 군부판서 상장군(密直副使 軍簿判書 上將軍) 박부(朴琈)의 셋째 딸과 혼인하였는데, 공손하고 부지런하고 정숙하여 덕이 규문(閨門)에 적합하였으며,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최중유(崔仲濡)는 좌사랑 지내지(左史郞 知內旨)로 재능과 도량이 남다르다. 2남 정오(晶悟)는 출가하였다. 3남 최중자(崔仲滋)는 연덕궁녹사(延德宮錄事)이다. 4남 원귀(元貴)는 출가하였다. 장녀는 근시호군(近侍護軍) 김륜(金倫)에게 시집갔는데, 도첨의참리 집현대학사 동수국사 상장군 문신공(都僉議參理 集賢大學士 同修國史 上將軍 文愼公) 김변(金賆)의 아들로 행정능력[吏幹]이 매우 뛰어나다. 차녀는 광평부전첨(廣平府典僉) 조문근(趙文瑾)에게 시집갔는데, 부지밀직 상장군(副知密直 上將軍) 조변(趙抃)의 아들로 학업(學業)이 있다. ▨▨ 지위에 올라 덕이 그에 걸맞지 못한 자도 후손이 있는데, 공은 끝내 후손이 있을 것이다.
족제(族弟)인 삼사총랑 지내지(三司摠郞 知內旨) 임중▨(林仲▨)이 짓다.
명(銘)하여 이른다.
최씨는 이름난 성[顯姓]으로, 대대로 문성(文聲)이 드러났다.
가지가 나뉘어 친족이 번성하였고, 문호(門戶)가 ▨▨
▨▨▨▨, ▨▨▨▨.
▨▨▨▨, 아름다운 명성 이어짐이 있으리라.
笑軒居士墓誌
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版圖判書文翰學士致仕崔瑞墓誌
大德九年乙巳二月十日丙戌, 公卒. 二十八日, 葬于松林縣地大德山南麓, 禮也.
公諱瑞, 字夢其, 安西人也. 王考諱淳, 官至朝散大夫尙書戶部侍郞. 故王祖諱洪胤, 位至金紫光祿大夫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兵部事, 贈諡景文公. 卒王祖考金紫光祿大夫檢校大傅守司空中書門下侍郞平章事上柱國, 贈諡靖順公灌. 卒母任氏, 封定安郡夫人, 考尙書都官郞中國學直講絪壽. 故此公之家世也.
公不以綺紈爲心, 氷淸水潔, 恬淡剛明. 甲寅春, 初得官於江華判官, 是年擢第. 乙卯冬, 調延陵直. 丙辰秋, 爲秘書校勘. 中統元年, 出爲處仁縣令. 四年十二月, 入作大官丞, 仍帶式目錄事. 至元六年, 佐幕於北界, 先知有變, 航海如京, 扈駕於燕都. 七年, 還國, 拜犀▨, 入烏府. 八年, 遷右正言知制誥. 九年, 以禮部員外郞, 爲甫州副使, 旣而移忠州判官, 秩滿, 爲閤門通事舍人. 十二年秋, 以工部員外, 出按交州道, 遷版圖佐郞. 十三年, 拜殿中侍史. 十五年秋, 以典理佐郞, 出按全羅道, 十月, 拜秘書丞. 十六年春, 中舍郞知制誥, 出按慶尙道. 十八年, 爲僉議典書知制誥. 十九年春, 出爲東界安集使, 八月, 朝散大夫版圖摠郞, 出守安東大都護府.
二十三年, 以朝顯大夫試典法摠郞知制誥, 復命. 二十四年春, 以典理摠郞知制誥, 出按忠淸道, 六月, 拜朝奉大夫大府▨▨▨▨▨▨, 九月, 遷右司議大夫, 十二月, 充史館修撰官. 二十五年, 以左司議, 帶寶文署直學士. 二十七年, 窮寇入境, 以中烈大夫左司議寶文學士知制誥, 出▨▨▨▨▨揮使. 二十八年, 爲榮烈大夫判大府事. 二十九年, 遷正獻大夫判秘書事膺善府左詹事. 三十一年, 皇帝有命, 以耽羅復爲我土. 分符之始, 實難其人, 公受命往, 諧克復古風.
元貞二年, 以鴻樞懸車. 自號笑軒無著居士, 常誦金剛經, 日修淨業, 享年七十三, 終于家.
凡從仕已來, 以廉平爲己任, 中外賢勞, 東西惟命, 終始一節, 茂著聲績.
始娶秘書監閔徽之女, 生四男, 皆早逝. 後娶密直副使軍簿判書上將軍朴琈第三女, 恭謹貞淑, 德協閨門, 有四男二女. 一男仲濡, 左史郞知內旨, 材器穎異. 二男晶悟, 出家. 三男仲滋, 延德宮錄事. 四男元貴, 出家. 一女嫡入近侍護軍金倫, 都僉議參理集賢大學士同修國史上將軍文愼公金賆之子, 大有吏幹. 二女嫡廣平府典僉趙文瑾, 副知密直上將軍趙抃之子, 有學業. ▨▨位不稱德者有後, 公其終有後乎.
族弟, 三司摠郞知內旨林仲▨題.
銘曰. 崔爲顯姓, 世著文聲. 支分族盛, 門戶▨▨. ▨▨▨▨, ▨▨▨▨. ▨▨▨▨, 令聞有繼.
소헌거사(笑軒居士) 묘지(墓誌)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판도판서 문한학사(奉翊大夫 副知密直司事 版圖判書 文翰學士)로 치사(致仕)한 최서(崔瑞) 묘지(墓誌)
대덕(大德) 9년 을사년(1305) 2월 10일 병술일에 공께서 돌아가셨다. 28일에 송림현(松林縣) 땅의 대덕산(大德山) 남쪽 기슭에 장사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공의 이름은 최서(崔瑞)이고, 자는 몽기(夢其)이며, 안서(安西) 사람이다. 아버지 최순(崔淳)은 관직이 조산대부 상서호부시랑(朝散大夫 尙書戶部侍郞)에 이르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최홍윤(崔洪胤)은 지위가 금자광록대부 수태보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병부사(金紫光祿大夫 守太保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兵部事)에 이르렀고, 추증된 시호는 경문공(景文公)이다.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는 금자광록대부 검교태부 수사공 중서문하시랑평장사 상주국(金紫光祿大夫 檢校太傅 守司空 中書門下侍郞平章事 上柱國)으로 추증된 시호가 정순공(靖順公)인 최관(崔灌)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임씨(任氏)는 정안군부인(定安君夫人)에 봉해졌는데, 그 아버지는 상서도관낭중 국학직강(尙書都官郞中 國學直講)이었던 임인수(任絪壽)이다. 이것이 공의 가세(家世)이다.
공은 고운 비단[綺紈]을 마음에 두지 않고, 얼음같이 맑고 물같이 깨끗하였으며, 담박하고 강직하고 명민하였다. 갑인년(1254) 봄에 처음으로 강화판관(江華判官)의 관직을 얻었고, 그해 과거에 발탁되었다. 을묘년(1255) 겨울에 연릉직(延陵直)에 임명되었다. 병진년(1256) 가을에 비서교감(秘書校勘)이 되었다. 중통(中統) 원년(1260)에 처인현령(處仁縣令)이 되어 나갔다. 〈중통〉 4년(1263) 12월에 〈개경으로〉 들어와서 대관승(大官丞)이 되었으며, 아울러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대하였다. 지원(至元) 6년(1269)에 북계(北界)의 좌막(佐幕)이 되었는데, 변고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바다를 건너 서울로 가서 연도(燕都)로 가는 어가를 호종하였다. 〈지원〉 7년(1270)에 고려로 돌아와서 서▨(犀▨)를 받고 오부(烏府)에 들어갔다. 〈지원〉 8년(1271)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옮겼다. 〈지원〉 9년(1272)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서 보주부사(甫州副使)가 되었다가 얼마 후 충주판관(忠州判官)으로 옮겼다. 임기가 차자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이 되었다. 〈지원〉 12년(1275) 가을에 공부원외(工部員外)로서 교주도 안찰사(交州道按察使)로 나갔다가 판도좌랑(版啚佐郞)으로 옮겼다. 〈지원〉 13년(1276)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다. 〈지원〉 15년(1278) 가을에 전리좌랑(典理佐郞)으로서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나갔다가 10월에 비서승(秘書丞)이 되었다. 〈지원〉 16년(1279) 봄에 중사랑 지제고(中舍郞 知制誥)가 되어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나갔다. 〈지원〉 18년(1281)에 첨의전서 지제고(僉議典書 知制誥)가 되었다. 〈지원〉 19년(1282) 봄에 동계안집사(東界安集使)가 되어 나갔다가, 8월에 조산대부 판도총랑(朝散大夫 版啚摠郞)이 되었으며,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의 수령으로 나갔다.
〈지원〉 23년(1286)에 조현대부 시전법총랑 지제고(朝顯大夫 試典法摠郞 知制誥)로서 복명(復命)하였다. 〈지원〉 24년(1287) 봄에 전리총랑 지제고(典理摠郞 知制誥)로서 충청도안찰사(忠淸道按察使)로 나갔다가, 6월에 조봉대부(朝奉大夫) 대부(大府)▨▨▨▨▨▨에 제배되었으며, 9월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옮겼고, 12월에 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이 되었다. 〈지원〉 25년(1288)에 좌사의(左司議)로서 보문서직학사(寶文署直學士)를 겸대하였다. 〈지원〉 27년(1290)에 궁핍한 도적이 국경으로 들어오자 중렬대부 좌사의 보문학사 지제고(中烈大夫 左司議 寶文學士 知制誥)로서 ▨▨▨▨▨휘사(揮使)가 되어 나갔다. 〈지원〉 28년(1291)에 영렬대부 판대부사(榮烈大夫 判大府事)가 되었다. 〈지원〉 29년(1292)에 정헌대부 판비서사 응선부좌첨사(正獻大夫 判秘書事 膺善府左詹事)로 옮겼다. 〈지원〉 31년(1294)에 황제가 명을 내려 탐라(耽羅)를 다시 우리 땅으로 삼게 하였다. 처음 부절(符節)을 나누는데, 실로 그 적임자를 〈구하기〉 어려웠으나 공이 명을 받고 〈탐라로〉 가서 옛 풍속을 온전히 복구하였다.
원정(元貞) 2년(1296)에 홍추(鴻樞)로서 관직에서 물러났다[懸車]. 자호(自號)를 소헌무착거사(笑軒無著居士)라고 하고, 항상 『금강경(金剛經)』을 읽으며 날마다 정업(淨業)을 닦다가, 향년 73세로 집에서 돌아가셨다.
무릇 벼슬한 이래 청렴함과 공평함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에서 어질게 노력하였고, 동쪽과 서쪽에서 오직 왕명에 따랐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한결같이 하였으니, 명성과 공적이 무성하였다.
처음 비서감(秘書監) 민휘(閔徽)의 딸과 혼인하여 네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후에 밀직부사 군부판서 상장군(密直副使 軍簿判書 上將軍) 박부(朴琈)의 셋째 딸과 혼인하였는데, 공손하고 부지런하고 정숙하여 덕이 규문(閨門)에 적합하였으며,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최중유(崔仲濡)는 좌사랑 지내지(左史郞 知內旨)로 재능과 도량이 남다르다. 2남 정오(晶悟)는 출가하였다. 3남 최중자(崔仲滋)는 연덕궁녹사(延德宮錄事)이다. 4남 원귀(元貴)는 출가하였다. 장녀는 근시호군(近侍護軍) 김륜(金倫)에게 시집갔는데, 도첨의참리 집현대학사 동수국사 상장군 문신공(都僉議參理 集賢大學士 同修國史 上將軍 文愼公) 김변(金賆)의 아들로 행정능력[吏幹]이 매우 뛰어나다. 차녀는 광평부전첨(廣平府典僉) 조문근(趙文瑾)에게 시집갔는데, 부지밀직 상장군(副知密直 上將軍) 조변(趙抃)의 아들로 학업(學業)이 있다. ▨▨ 지위에 올라 덕이 그에 걸맞지 못한 자도 후손이 있는데, 공은 끝내 후손이 있을 것이다.
족제(族弟)인 삼사총랑 지내지(三司摠郞 知內旨) 임중▨(林仲▨)이 짓다.
명(銘)하여 이른다.
최씨는 이름난 성[顯姓]으로, 대대로 문성(文聲)이 드러났다.
가지가 나뉘어 친족이 번성하였고, 문호(門戶)가 ▨▨
▨▨▨▨, ▨▨▨▨.
▨▨▨▨, 아름다운 명성 이어짐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