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묘지명

국립중앙박물관

원본 해상도 3000 * 2002


  • 명칭이규보 묘지명
  • 다른명칭李奎報墓誌銘
  • 국적/시대한국 - 고려
  • 분류사회생활 - 의례생활 - 상장 - 묘지
  • 재질
  • 크기가로 106.5cm, 세로 66.4cm
  • 소장품번호 신수 5873

제 1유형 : 출처표시

저작권 보호분야 “이규보 묘지명”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1유형

* 소장품 및 소장정보의 오류는 해당 기관에 직접 문의 바랍니다.

원문


守太保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大子大保致仕贈諡文順公墓誌銘幷序
公姓李, 諱奎報, 字春卿, 黃驪縣人也. 曾祖諱殷伯, 皇中尹, 祖諱和, 皇檢校大將軍▨校尉, 考諱允綏, 皇戶部郞中, 母金氏, 金壤縣人也, 以公故封爲金蘭郡君, 蔚珍縣尉諱施政之女也.
公九歲, 能屬文, 至十五六, 洽聞强記. 凡著述不倣古人陳語. 平生不自名唐白, 時人皆指之曰走筆李唐白.
歲己酉, 於名宰相柳公權座下, 中司馬試第一. 明年, 赴禮部試於三場. 試日, 貢擧員重其名, 令飮宣醞數四杯, 稍酣下筆未精, 其科稍劣. 欲辭之更擧, 以嚴君切責, 亦無舊例, 辭不得. 謂賀客曰, “科第雖下, 豈不是三四度鑄門生者乎.”
丁巳, 冢宰趙公永仁等文儒四相, 聯名上箚子, 薦公於闕下, 箚子爲不平者所竊, 遂寢. 登第之十年, 出補全州管記, 屢抑通判之不法, 因被訴解職. 後館翰等儒官薦人, 每以公爲之首, 故於丁卯權補翰林院, 明年卽眞.
壬申正月, 除千牛衛錄事參軍事, 出院, 六月, 以兼直復院. 十二月, 不踐七品, 爲司宰丞, 仍兼直院. 乙亥, 直拜右正言, 歷左·右司諫. 己卯, 出爲桂陽府副使, 一年以試禮部郞中起居注見召. 自後, 除試大僕少卿·寶文閣待制·將作監·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判衛尉事, 於九年之間, 遷轉如此.
庚寅, 以無妄, 流于猬島. 其時, 以同罪被流者三人, 皆正直敢言之達官也. 辛卯, 蒙宥, 還京師. 時獺狚來侵, 公以散官, 凡講和文字皆任之. 壬辰四月, 起爲正議大夫判祕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詹事. 自入參, 至於是, 職除補外一年, 皆兼典誥.
癸巳六月, 拜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右散騎常侍寶文閣學士, 十二月, 入相爲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 乙未十二月, 爲參知政事修文殿大學士判戶部事太子太保. 冬十月, 上表乞退, 上遣近臣敦諭, 令復起, 公不得已起視事. 又乞退固切, 上重違其志▨可, 以守大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致仕.
嘗一典成均, 三闢禮闈, 所選多韻士. 自解位來, 以詩酒自娛, 尙讀楞嚴經, ▨至九卷. 亦國有大冊異朝書表等事, 無所不爲.
越辛丑七月, 得微恙, 時之當國大臣, 連遣名醫問診. 取公所著文集, 命工雕刻. 欲令公眼見, 事巨未畢, 至九月初二日, 卒于私第, 享年七十四. 上哀悼, 勅有司, 令百官會葬, 贈諡曰文順公.
噫, 公之官爵次序, 旣列於前, 其瑞應行事之迹, 敢闕于後.
公生數月, 惡瘡滿身, 面目皆爛, 乳嫗出置門外. 有一老父過視之曰, “此兒不啻萬金, 宜善護養.” 嫗走報家君, 君疑其神人, 數路追之不得. 此神物護公於襁褓也.
公之欲赴司馬試, 夢見着碪練緇布衣人群飮堂上, 傍人曰, “此二十八宿也.” 公驚悚再拜, 問今年試席捷否, 有一人指一人曰, “彼乃奎星, 宜就問之.” 公就問, 未聞其言而寤. 俄復夢, 且一人來報, “子必占魁頭, 此天機, 但勿泄耳.” 前名仁氐, 因改今名赴試, 果中第一. 此靈曜之攝公於名敎出也.
壬戌, 東京叛, 遣三軍討之. 軍幕欲以散官及第充修製員, 戰者危事, 皆以計避之. 公獨慨然曰, “予雖懦怯, 避國難, 非人也,” 遂從軍. 此公之勇於義也.
戊寅, 於八關會侍御宴, 禮數未半, 而有一宰相促罷之. 公曰, “君賜也, 不可取次處分.” 雖因此而被流, 此公之執法不撓也.
所謂獺狚者, 頑如禽獸, 奏之以鈞天廣樂, 而不足以開其胸, 投之以隋珠和璧, 而不足以解其顔. 及聞公之文字事意, 惻然有感, 所諭皆從, 此公之至誠能動無情者也.
娶大府卿晉昇第二女, 生男四女二. 男長先公沒. 次今爲知洪州事副使尙食奉御. 次爲慶仙店錄事. 次爲西大悲院錄事. 女長適入內侍掖庭內謁者監. 季適內侍慶禧宮錄事.
於戲, 墓銘之作尙矣, 其功名顯顯爲世所尙, 然後爲之. 蓋將使後之人知曠世之上有雄偉不常者矣. 雖其人雄偉不常, 而銘不待其人, 則不若無之之爲愈也. 予拙於爲文, 公於平日從容之際, 每稱, “吾之沒也, 子其銘乎.” 其嗣子述公之意書, 來請銘, 不得已而銘之.
銘曰. 江左汾陽, 海東孔子, 溫良恭儉, 哀榮終始. 七十以前, 與世爲賢, 玉樓作記, 於公細事, 斡旋元氣, 是公之位. 七十以後, 爲天所有, 人望未厭, 天取不廉. 天奪其眞, 地得厥身, 焉得爲二, 在天在地. 其人茫茫, 所留文章, 亦恐六丁, 雷電取將. 鳩集工徒, 勒之金石, 一鏡云亡, 天子憫惻. 爰命有司, 宅名山側, 原野畇畇, 峯巒翼翼. 山旣靈兮, 子孫萬億.
時大歲辛丑十一月日, 入內侍朝散大夫尙書禮部侍郞直寶文閣大子文學李需, 述.

번역문


수태보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太保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禮部事 翰林院事 太子大保)로 치사(致仕)하고 추증된 시호가 문순공(文順公, 이규보)인 분의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공의 성은 이(李)이고, 이름은 규보(奎報)이며, 자는 춘경(春卿)으로 황려현(黃驪縣) 사람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은백(李殷伯)으로 중윤(中尹)이었고, 할아버지는 이화(李和)로 검교대장군▨교위(檢校大將軍▨校尉)였으며, 아버지는 이윤수(李允綏)로 호부낭중(戶部郞中)이었고, 어머니 김씨(金氏)는 금양현(金壤縣) 사람으로 공 덕분에 금란군군(金蘭郡君)으로 봉해졌는데, 울진현위(蔚珍縣尉) 김시정(金施政)의 딸이다.
공은 9세에 글짓기를 잘 하였으며[能屬文], 15, 6세가 되자 견문이 넓고 기억을 잘하였다. 무릇 〈그의〉 저술은 옛사람의 묵은 말을 본뜨지 않았다. 평생 스스로를 당나라의 이백[唐白]이라고 이름하지 않았으나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가리켜 주필(走筆) 이당백(李唐白)이라고 하였다.
기유년(1189)에 명재상 좌주(座主) 유공권(柳公權) 아래에서 사마시(司馬試) 제1인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1190) 예부시(禮部試)의 삼장(三場)에 응시하였다. 시험 보는 날 공거(貢擧)하는 관원이 그 명성을 중히 여겨 선온(宣醞)을 네댓 잔 마시게 하자, 〈공이〉 조금 취하여 붓놀림이 정묘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성적이 조금 나빴다. 〈공이〉 합격을 사양하고 다시 응시하려 하였으나, 엄군(嚴君)이 크게 꾸짖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례도 없었으므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하객(賀客)들에게 말하기를, “과거 성적은 비록 낮지만 어찌 서너 번 문생(門生)을 조련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정사년(1197)에 총재(冢宰) 조영인(趙永仁) 공 등 문유(文儒) 네 재상이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궐하(闕下)에 공을 천거하려 하였으나, 차자가 불평을 품은 자에게 도난당하는 바람에 끝내 〈그 논의가〉 가라앉았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 만에 전주(全州)의 관기(管記)로 보임되어 나갔는데, 여러 번 통판(通判)의 불법을 막다가 그 때문에 피소되고 해직되었다. 후에 관한(館翰) 등의 유관(儒官)들이 사람을 천거할 때 매번 공을 처음으로 삼았으므로, 정묘년(1207)에 임시로 한림원(權翰林院)으로 보임되었다가 이듬해(1208)에 진(眞)으로 나아갔다.
임신년(1212) 정월에 천우위녹사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에 제수되어 한림원에서 나왔으나 6월에 직한림원[直]을 겸함으로써 한림원에 복직하였다. 12월에는 7품직을 거치지 않고 사재승(司宰丞)이 되었으며 직한림원[直院]을 겸하였다. 을해년(1215)에 바로 우정언(右正言)에 제수되었고 좌사간·우사간[左右司諫]을 역임하였다. 기묘년(1219)에 계양부부사(桂陽府副使)가 되어 나갔다가 1년 뒤 시예부낭중 기거주(試禮部郞中 起居注)로 불려왔다. 이로부터 시대복소경(試大僕少卿)·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장작감(將作監)·국자좨주(國子祭酒)·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판위위사(判衛尉事)에 제수되었으니, 9년 동안 옮긴 것이 이와 같다.
경인년(1230)에 잘못도 없이 위도(猬島)에 유배되었다. 그때 같은 죄로 유배된 사람이 세 명이었는데 모두 정직하게 직언[敢言]하는 뛰어난 관리였다. 신묘년(1231)에 용서를 받아 서울[京師]로 돌아왔다. 이때 달단(獺狚)이 침범해왔는데, 공은 산관(散官)으로서 모든 강화(講和)와 관련된 문서[文字]를 다 맡았다. 임진년(1232) 4월에 정의대부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첨사(正議大夫 判秘書省事 寶文閣學士 慶成府詹事)로 기용되었다. 참직(參職)에 들어와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관직은 외직[外]에 보임되었던 1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고(典誥)를 겸하였다.
계사년(1233) 6월에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 보문각학사(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右散騎常侍 寶文閣學士)에 제배되었고, 12월에 재상으로 들어가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 戶部尙書 集賢殿大學士 判禮部事)가 되었다. 을미년(1235) 12월에 참지정사 수문전대학사 판호부사 태자태보(參知政事 修文殿大學士 判戶部事 太子太保)가 되었다. 10월에 표문(表文)을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乞退], 임금께서 근신(近臣)을 보내 간절히 일깨워 다시 일어서게 하니, 공은 부득이하게 일어나서 일을 보았다. 또다시 굳고 간절하게 물러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그 뜻을 거듭 어기기가 ▨ 하시어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大保 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禮部事 翰林院事 太子大保)로 치사하게 하였다.
〈공은〉 예전에 한 번 성균시[成均]를 관장하였고 세 번 예부시[禮闈]를 주관하였으니, 선발한 자들 가운데 운사(韻士)가 많았다. 자리에서 물러난 이래 시와 술로 스스로 즐기며 항상 『능엄경(楞嚴經)』을 읽었는데 ▨ 9권에 이르렀다. 또한 국가에 대책(大冊)이나 외국[異朝]〈에 보내는〉 서(書)와 표(表) 등의 일이 있으면 맡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신축년(1241) 7월에 작은 병을 앓자 그때 국정을 담당하는 대신들이 연달아 명의(名醫)를 보내 진료[問診]하게 하였다. 〈또한〉 공이 지은 문집(文集)을 모아 공인(工人)으로 하여금 판에 새기도록 명하였다. 공으로 하여금 〈문집을〉 눈으로 보게 하려고 하였으나 일이 방대하여 끝마치지 못하였는데, 9월 초2일에 이르러 사제(私第)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4세이다. 임금께서 애도하시고 담당 관청에게 명하여 백관들로 하여금 장례에 참여하도록 하였으며, 시호를 추증하여 문순공(文順公)이라 하였다.
아, 공의 관작(官爵) 순서는 앞에서 열거하였으니, 그 상서로움이 일에 응하였던 자취를 감히 뒤에 빠뜨리겠는가.
공이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심한 종기가 몸을 덮고 얼굴이 모두 문드러져서 유모가 문밖에 내다 놓았다. 한 노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단지 만금(萬金) 정도가 아니니 잘 보호하고 길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유모가 달려가 가군(家君)에게 알리니, 아버지는 그가 신인(神人)인가 의심하여 여러 갈래로 그를 뒤쫓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는 신물(神物)이 공을 포대기에서 보호한 것이다.
공이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려 할 때 꿈에서 잘 다듬이질 된 검은 포의(布衣)를 입은 사람들이 당상(堂上)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는데, 곁에 있던 사람이 말하기를, “이분들은 28수(宿)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놀라고 황송하여 두 번 절하고 올해 시험을 보는 자리에서 이길 수 있을지를 물었더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분이 바로 규성(奎星)이니, 마땅히 그에게 가서 물어보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가서 물어보았으나 그 말을 듣지 못하고 잠에서 깼다. 잠시 후 다시 꿈을 꾸자 다시 한 사람이 와서 알려주기를, “그대는 분명 장원[魁頭]을 차지할 것이나, 이는 하늘의 기밀이니 오직 누설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공의〉 예전 이름은 인저(仁氐)였으나 〈이 일로〉 인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과거에 응시하여 과연 제1인으로 급제하였다. 이는 신령한 별[靈曜]이 뛰어난 가르침[名敎]으로 공을 도와준 것이다.
임술년(1202)에 동경(東京)이 반란을 일으키자 삼군(三軍)을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군막(軍幕)에서 산관(散官)인 급제자를 수제원(修製員)으로 충당하려 하였으나,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라 모두 꾀를 써서 피하였다. 공이 홀로 개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비록 나약하고 겁이 많지만, 나라의 어려움을 피한다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끝내 종군하였다. 이는 공이 의(義)에 있어서 용감한 것이다.
무인년(1218)에 팔관회(八關會)에서 임금을 모시는 연회가 있었는데, 예수(禮數)가 반도 지나지 않아서 한 재상이 이를 파할 것을 재촉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하사하셨으니, 제멋대로 처분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비록 이로 인해 〈공이〉 유배에 처해졌으나, 이는 공의 법 집행이 굽혀지지 않은 것이다.
소위 달단(㺚狚)이라는 자들은 금수(禽獸)와 같이 완악하여 균천(鈞天)의 광대한 음악[鈞天廣樂]을 연주해주어도 그 마음을 열기에 부족하며, 수후(隋侯)의 구슬과 화씨(和氏)의 구슬[隋珠和璧]을 던져주어도 그 얼굴을 펴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공의 문자(文字)와 사의(事意)를 듣고서는 측연히 감동하여 깨우치는 바를 모두 따랐으니, 이는 공의 지극한 정성이 인정 없는 자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공은〉 대부경(大府卿) 진승(晉昇)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다. 장남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차남은 지금의 지홍주사부사 상식봉어(知洪州事副使 尙食奉御)이다. 셋째 아들은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이다. 넷째 아들은 서대비원녹사(西大悲院錄事)이다. 첫째 딸은 내시 액정내알자감(內侍 掖庭內謁者監)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내시 경희궁녹사(內侍 慶禧宮錄事)에게 시집갔다.
아, 묘지명[墓銘]을 짓는 것은 숭상한다는 것이니, 그 공적과 명성이 밝게 드러나 세상이 숭상하는 바가 된 연후에야 그것을 짓는다. 〈이는〉 대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드물게 뛰어나고 훌륭하기가 보통이 아닌 사람이 있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람이 뛰어나고 훌륭하였더라도 명(銘)에 있어서 적당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명이〉 아예 없는 것만 못하게 된다. 나는 글을 짓는 것이 졸렬하지만, 공이 평소 조용할 때면 항상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그대가 명을 지어주시오.”라고 하였다. 그 아들이 공의 뜻을 적은 글을 가져와서 명을 청하니, 부득이하게 명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강좌(江左)의 분양(汾陽)이요 해동의 공자(孔子)이니,
온화하고 정직하고 공경하고 검소하여 임금의 영예[哀榮]가 한결같았다.
칠십 이전에는 세상의 현자(賢者)였으니
옥루(玉樓)에서 글 짓는 것은 공에게 사소한 일이었으며,
원기(元氣)를 알선(斡旋)하는 것은 공의 지위였다.
칠십 이후에는 하늘에게 소유되었으니
사람들의 바람이 가라앉기 전에 하늘이 염치없이 〈공을〉 빼앗아갔다.
하늘은 그 참됨을 빼앗고 땅은 그 몸을 얻었으니
어찌 둘이 되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겠는가.
그 사람은 아득히 멀어졌으나 문장만이 남았는데
육정(六丁)이 천둥 번개 내리며 〈문장을〉 가져갈까 염려하여
공인들[工徒]을 모아 금석(金石)에 새기는데
하나의 거울이 사라졌다 하니 천자도 애달파하네.
이에 담당 관청에게 명하여 명산 옆에 묏자리를 정하니
들은 널리 널리 펼쳐져 있고 봉우리는 우뚝우뚝 솟아 있다.
산의 신령스러움이여, 자손이 억만이 되리라.
때는 대세(大歲) 신축년(1241) 11월 일, 내시(內侍)로 들어가고 조산대부 상서예부시랑 직보문각 대자문학(朝散大夫 尙書禮部侍郞 直寶文閣 大子文學)인 이수(李需)가 짓다.
- 번역자: 서은혜

원문


守太保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大子大保致仕贈諡文順公墓誌銘幷序
公姓李, 諱奎報, 字春卿, 黃驪縣人也. 曾祖諱殷伯, 皇中尹, 祖諱和, 皇檢校大將軍▨校尉, 考諱允綏, 皇戶部郞中, 母金氏, 金壤縣人也, 以公故封爲金蘭郡君, 蔚珍縣尉諱施政之女也.
公九歲, 能屬文, 至十五六, 洽聞强記. 凡著述不倣古人陳語. 平生不自名唐白, 時人皆指之曰走筆李唐白.
歲己酉, 於名宰相柳公權座下, 中司馬試第一. 明年, 赴禮部試於三場. 試日, 貢擧員重其名, 令飮宣醞數四杯, 稍酣下筆未精, 其科稍劣. 欲辭之更擧, 以嚴君切責, 亦無舊例, 辭不得. 謂賀客曰, “科第雖下, 豈不是三四度鑄門生者乎.”
丁巳, 冢宰趙公永仁等文儒四相, 聯名上箚子, 薦公於闕下, 箚子爲不平者所竊, 遂寢. 登第之十年, 出補全州管記, 屢抑通判之不法, 因被訴解職. 後館翰等儒官薦人, 每以公爲之首, 故於丁卯權補翰林院, 明年卽眞.
壬申正月, 除千牛衛錄事參軍事, 出院, 六月, 以兼直復院. 十二月, 不踐七品, 爲司宰丞, 仍兼直院. 乙亥, 直拜右正言, 歷左·右司諫. 己卯, 出爲桂陽府副使, 一年以試禮部郞中起居注見召. 自後, 除試大僕少卿·寶文閣待制·將作監·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判衛尉事, 於九年之間, 遷轉如此.
庚寅, 以無妄, 流于猬島. 其時, 以同罪被流者三人, 皆正直敢言之達官也. 辛卯, 蒙宥, 還京師. 時獺狚來侵, 公以散官, 凡講和文字皆任之. 壬辰四月, 起爲正議大夫判祕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詹事. 自入參, 至於是, 職除補外一年, 皆兼典誥.
癸巳六月, 拜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右散騎常侍寶文閣學士, 十二月, 入相爲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 乙未十二月, 爲參知政事修文殿大學士判戶部事太子太保. 冬十月, 上表乞退, 上遣近臣敦諭, 令復起, 公不得已起視事. 又乞退固切, 上重違其志▨可, 以守大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致仕.
嘗一典成均, 三闢禮闈, 所選多韻士. 自解位來, 以詩酒自娛, 尙讀楞嚴經, ▨至九卷. 亦國有大冊異朝書表等事, 無所不爲.
越辛丑七月, 得微恙, 時之當國大臣, 連遣名醫問診. 取公所著文集, 命工雕刻. 欲令公眼見, 事巨未畢, 至九月初二日, 卒于私第, 享年七十四. 上哀悼, 勅有司, 令百官會葬, 贈諡曰文順公.
噫, 公之官爵次序, 旣列於前, 其瑞應行事之迹, 敢闕于後.
公生數月, 惡瘡滿身, 面目皆爛, 乳嫗出置門外. 有一老父過視之曰, “此兒不啻萬金, 宜善護養.” 嫗走報家君, 君疑其神人, 數路追之不得. 此神物護公於襁褓也.
公之欲赴司馬試, 夢見着碪練緇布衣人群飮堂上, 傍人曰, “此二十八宿也.” 公驚悚再拜, 問今年試席捷否, 有一人指一人曰, “彼乃奎星, 宜就問之.” 公就問, 未聞其言而寤. 俄復夢, 且一人來報, “子必占魁頭, 此天機, 但勿泄耳.” 前名仁氐, 因改今名赴試, 果中第一. 此靈曜之攝公於名敎出也.
壬戌, 東京叛, 遣三軍討之. 軍幕欲以散官及第充修製員, 戰者危事, 皆以計避之. 公獨慨然曰, “予雖懦怯, 避國難, 非人也,” 遂從軍. 此公之勇於義也.
戊寅, 於八關會侍御宴, 禮數未半, 而有一宰相促罷之. 公曰, “君賜也, 不可取次處分.” 雖因此而被流, 此公之執法不撓也.
所謂獺狚者, 頑如禽獸, 奏之以鈞天廣樂, 而不足以開其胸, 投之以隋珠和璧, 而不足以解其顔. 及聞公之文字事意, 惻然有感, 所諭皆從, 此公之至誠能動無情者也.
娶大府卿晉昇第二女, 生男四女二. 男長先公沒. 次今爲知洪州事副使尙食奉御. 次爲慶仙店錄事. 次爲西大悲院錄事. 女長適入內侍掖庭內謁者監. 季適內侍慶禧宮錄事.
於戲, 墓銘之作尙矣, 其功名顯顯爲世所尙, 然後爲之. 蓋將使後之人知曠世之上有雄偉不常者矣. 雖其人雄偉不常, 而銘不待其人, 則不若無之之爲愈也. 予拙於爲文, 公於平日從容之際, 每稱, “吾之沒也, 子其銘乎.” 其嗣子述公之意書, 來請銘, 不得已而銘之.
銘曰. 江左汾陽, 海東孔子, 溫良恭儉, 哀榮終始. 七十以前, 與世爲賢, 玉樓作記, 於公細事, 斡旋元氣, 是公之位. 七十以後, 爲天所有, 人望未厭, 天取不廉. 天奪其眞, 地得厥身, 焉得爲二, 在天在地. 其人茫茫, 所留文章, 亦恐六丁, 雷電取將. 鳩集工徒, 勒之金石, 一鏡云亡, 天子憫惻. 爰命有司, 宅名山側, 原野畇畇, 峯巒翼翼. 山旣靈兮, 子孫萬億.
時大歲辛丑十一月日, 入內侍朝散大夫尙書禮部侍郞直寶文閣大子文學李需, 述.

번역문


수태보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太保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禮部事 翰林院事 太子大保)로 치사(致仕)하고 추증된 시호가 문순공(文順公, 이규보)인 분의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공의 성은 이(李)이고, 이름은 규보(奎報)이며, 자는 춘경(春卿)으로 황려현(黃驪縣) 사람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은백(李殷伯)으로 중윤(中尹)이었고, 할아버지는 이화(李和)로 검교대장군▨교위(檢校大將軍▨校尉)였으며, 아버지는 이윤수(李允綏)로 호부낭중(戶部郞中)이었고, 어머니 김씨(金氏)는 금양현(金壤縣) 사람으로 공 덕분에 금란군군(金蘭郡君)으로 봉해졌는데, 울진현위(蔚珍縣尉) 김시정(金施政)의 딸이다.
공은 9세에 글짓기를 잘 하였으며[能屬文], 15, 6세가 되자 견문이 넓고 기억을 잘하였다. 무릇 〈그의〉 저술은 옛사람의 묵은 말을 본뜨지 않았다. 평생 스스로를 당나라의 이백[唐白]이라고 이름하지 않았으나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가리켜 주필(走筆) 이당백(李唐白)이라고 하였다.
기유년(1189)에 명재상 좌주(座主) 유공권(柳公權) 아래에서 사마시(司馬試) 제1인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1190) 예부시(禮部試)의 삼장(三場)에 응시하였다. 시험 보는 날 공거(貢擧)하는 관원이 그 명성을 중히 여겨 선온(宣醞)을 네댓 잔 마시게 하자, 〈공이〉 조금 취하여 붓놀림이 정묘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성적이 조금 나빴다. 〈공이〉 합격을 사양하고 다시 응시하려 하였으나, 엄군(嚴君)이 크게 꾸짖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례도 없었으므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하객(賀客)들에게 말하기를, “과거 성적은 비록 낮지만 어찌 서너 번 문생(門生)을 조련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정사년(1197)에 총재(冢宰) 조영인(趙永仁) 공 등 문유(文儒) 네 재상이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궐하(闕下)에 공을 천거하려 하였으나, 차자가 불평을 품은 자에게 도난당하는 바람에 끝내 〈그 논의가〉 가라앉았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 만에 전주(全州)의 관기(管記)로 보임되어 나갔는데, 여러 번 통판(通判)의 불법을 막다가 그 때문에 피소되고 해직되었다. 후에 관한(館翰) 등의 유관(儒官)들이 사람을 천거할 때 매번 공을 처음으로 삼았으므로, 정묘년(1207)에 임시로 한림원(權翰林院)으로 보임되었다가 이듬해(1208)에 진(眞)으로 나아갔다.
임신년(1212) 정월에 천우위녹사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에 제수되어 한림원에서 나왔으나 6월에 직한림원[直]을 겸함으로써 한림원에 복직하였다. 12월에는 7품직을 거치지 않고 사재승(司宰丞)이 되었으며 직한림원[直院]을 겸하였다. 을해년(1215)에 바로 우정언(右正言)에 제수되었고 좌사간·우사간[左右司諫]을 역임하였다. 기묘년(1219)에 계양부부사(桂陽府副使)가 되어 나갔다가 1년 뒤 시예부낭중 기거주(試禮部郞中 起居注)로 불려왔다. 이로부터 시대복소경(試大僕少卿)·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장작감(將作監)·국자좨주(國子祭酒)·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판위위사(判衛尉事)에 제수되었으니, 9년 동안 옮긴 것이 이와 같다.
경인년(1230)에 잘못도 없이 위도(猬島)에 유배되었다. 그때 같은 죄로 유배된 사람이 세 명이었는데 모두 정직하게 직언[敢言]하는 뛰어난 관리였다. 신묘년(1231)에 용서를 받아 서울[京師]로 돌아왔다. 이때 달단(獺狚)이 침범해왔는데, 공은 산관(散官)으로서 모든 강화(講和)와 관련된 문서[文字]를 다 맡았다. 임진년(1232) 4월에 정의대부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첨사(正議大夫 判秘書省事 寶文閣學士 慶成府詹事)로 기용되었다. 참직(參職)에 들어와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관직은 외직[外]에 보임되었던 1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고(典誥)를 겸하였다.
계사년(1233) 6월에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 보문각학사(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右散騎常侍 寶文閣學士)에 제배되었고, 12월에 재상으로 들어가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 戶部尙書 集賢殿大學士 判禮部事)가 되었다. 을미년(1235) 12월에 참지정사 수문전대학사 판호부사 태자태보(參知政事 修文殿大學士 判戶部事 太子太保)가 되었다. 10월에 표문(表文)을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乞退], 임금께서 근신(近臣)을 보내 간절히 일깨워 다시 일어서게 하니, 공은 부득이하게 일어나서 일을 보았다. 또다시 굳고 간절하게 물러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그 뜻을 거듭 어기기가 ▨ 하시어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大保 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禮部事 翰林院事 太子大保)로 치사하게 하였다.
〈공은〉 예전에 한 번 성균시[成均]를 관장하였고 세 번 예부시[禮闈]를 주관하였으니, 선발한 자들 가운데 운사(韻士)가 많았다. 자리에서 물러난 이래 시와 술로 스스로 즐기며 항상 『능엄경(楞嚴經)』을 읽었는데 ▨ 9권에 이르렀다. 또한 국가에 대책(大冊)이나 외국[異朝]〈에 보내는〉 서(書)와 표(表) 등의 일이 있으면 맡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신축년(1241) 7월에 작은 병을 앓자 그때 국정을 담당하는 대신들이 연달아 명의(名醫)를 보내 진료[問診]하게 하였다. 〈또한〉 공이 지은 문집(文集)을 모아 공인(工人)으로 하여금 판에 새기도록 명하였다. 공으로 하여금 〈문집을〉 눈으로 보게 하려고 하였으나 일이 방대하여 끝마치지 못하였는데, 9월 초2일에 이르러 사제(私第)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4세이다. 임금께서 애도하시고 담당 관청에게 명하여 백관들로 하여금 장례에 참여하도록 하였으며, 시호를 추증하여 문순공(文順公)이라 하였다.
아, 공의 관작(官爵) 순서는 앞에서 열거하였으니, 그 상서로움이 일에 응하였던 자취를 감히 뒤에 빠뜨리겠는가.
공이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심한 종기가 몸을 덮고 얼굴이 모두 문드러져서 유모가 문밖에 내다 놓았다. 한 노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단지 만금(萬金) 정도가 아니니 잘 보호하고 길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유모가 달려가 가군(家君)에게 알리니, 아버지는 그가 신인(神人)인가 의심하여 여러 갈래로 그를 뒤쫓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는 신물(神物)이 공을 포대기에서 보호한 것이다.
공이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려 할 때 꿈에서 잘 다듬이질 된 검은 포의(布衣)를 입은 사람들이 당상(堂上)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는데, 곁에 있던 사람이 말하기를, “이분들은 28수(宿)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놀라고 황송하여 두 번 절하고 올해 시험을 보는 자리에서 이길 수 있을지를 물었더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분이 바로 규성(奎星)이니, 마땅히 그에게 가서 물어보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가서 물어보았으나 그 말을 듣지 못하고 잠에서 깼다. 잠시 후 다시 꿈을 꾸자 다시 한 사람이 와서 알려주기를, “그대는 분명 장원[魁頭]을 차지할 것이나, 이는 하늘의 기밀이니 오직 누설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공의〉 예전 이름은 인저(仁氐)였으나 〈이 일로〉 인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과거에 응시하여 과연 제1인으로 급제하였다. 이는 신령한 별[靈曜]이 뛰어난 가르침[名敎]으로 공을 도와준 것이다.
임술년(1202)에 동경(東京)이 반란을 일으키자 삼군(三軍)을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군막(軍幕)에서 산관(散官)인 급제자를 수제원(修製員)으로 충당하려 하였으나,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라 모두 꾀를 써서 피하였다. 공이 홀로 개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비록 나약하고 겁이 많지만, 나라의 어려움을 피한다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끝내 종군하였다. 이는 공이 의(義)에 있어서 용감한 것이다.
무인년(1218)에 팔관회(八關會)에서 임금을 모시는 연회가 있었는데, 예수(禮數)가 반도 지나지 않아서 한 재상이 이를 파할 것을 재촉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하사하셨으니, 제멋대로 처분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비록 이로 인해 〈공이〉 유배에 처해졌으나, 이는 공의 법 집행이 굽혀지지 않은 것이다.
소위 달단(㺚狚)이라는 자들은 금수(禽獸)와 같이 완악하여 균천(鈞天)의 광대한 음악[鈞天廣樂]을 연주해주어도 그 마음을 열기에 부족하며, 수후(隋侯)의 구슬과 화씨(和氏)의 구슬[隋珠和璧]을 던져주어도 그 얼굴을 펴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공의 문자(文字)와 사의(事意)를 듣고서는 측연히 감동하여 깨우치는 바를 모두 따랐으니, 이는 공의 지극한 정성이 인정 없는 자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공은〉 대부경(大府卿) 진승(晉昇)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과 딸 둘을 낳았다. 장남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차남은 지금의 지홍주사부사 상식봉어(知洪州事副使 尙食奉御)이다. 셋째 아들은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이다. 넷째 아들은 서대비원녹사(西大悲院錄事)이다. 첫째 딸은 내시 액정내알자감(內侍 掖庭內謁者監)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내시 경희궁녹사(內侍 慶禧宮錄事)에게 시집갔다.
아, 묘지명[墓銘]을 짓는 것은 숭상한다는 것이니, 그 공적과 명성이 밝게 드러나 세상이 숭상하는 바가 된 연후에야 그것을 짓는다. 〈이는〉 대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드물게 뛰어나고 훌륭하기가 보통이 아닌 사람이 있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람이 뛰어나고 훌륭하였더라도 명(銘)에 있어서 적당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명이〉 아예 없는 것만 못하게 된다. 나는 글을 짓는 것이 졸렬하지만, 공이 평소 조용할 때면 항상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그대가 명을 지어주시오.”라고 하였다. 그 아들이 공의 뜻을 적은 글을 가져와서 명을 청하니, 부득이하게 명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강좌(江左)의 분양(汾陽)이요 해동의 공자(孔子)이니,
온화하고 정직하고 공경하고 검소하여 임금의 영예[哀榮]가 한결같았다.
칠십 이전에는 세상의 현자(賢者)였으니
옥루(玉樓)에서 글 짓는 것은 공에게 사소한 일이었으며,
원기(元氣)를 알선(斡旋)하는 것은 공의 지위였다.
칠십 이후에는 하늘에게 소유되었으니
사람들의 바람이 가라앉기 전에 하늘이 염치없이 〈공을〉 빼앗아갔다.
하늘은 그 참됨을 빼앗고 땅은 그 몸을 얻었으니
어찌 둘이 되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겠는가.
그 사람은 아득히 멀어졌으나 문장만이 남았는데
육정(六丁)이 천둥 번개 내리며 〈문장을〉 가져갈까 염려하여
공인들[工徒]을 모아 금석(金石)에 새기는데
하나의 거울이 사라졌다 하니 천자도 애달파하네.
이에 담당 관청에게 명하여 명산 옆에 묏자리를 정하니
들은 널리 널리 펼쳐져 있고 봉우리는 우뚝우뚝 솟아 있다.
산의 신령스러움이여, 자손이 억만이 되리라.
때는 대세(大歲) 신축년(1241) 11월 일, 내시(內侍)로 들어가고 조산대부 상서예부시랑 직보문각 대자문학(朝散大夫 尙書禮部侍郞 直寶文閣 大子文學)인 이수(李需)가 짓다.
- 번역자: 서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