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청화묘지
국립중앙박물관
원본 해상도 1024 * 768
(1판)
有明朝鮮國贈議政府左贊成咸豊君行通政大
夫昌原大都護府使朴公墓誌銘
我聖上卽位之越三年戊申春羣不逞蘖芽內外
起湖嶺通畿甸兇鋒稱亂三百年宗社殆呼吸間
上御帳殿顧瞻咨嗟曰惟予文武臣疇能殲此賊
者于時臣纘新在禁廂僉曰可遂號招討中軍 命
出征不旬月而鏖平之旣凱旋䇿奮武勳階資憲封
咸寧君推恩三代如例得贈其皇考大都護府君
爲純忠績德補祚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
判義禁府事世子貳師五衛都摠府都摠管咸豊(君)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증 의정부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 함풍군(咸豊君) 행 통정대부(行通政大夫) 창원대도호부사(昌原大都護府使) 박공(朴公) 묘지명(墓誌銘)
우리 성상(聖上, 영조)이 왕위에 즉위한 지 3년이 더 지난 무신년(1728) 봄에, 무리들이 임금에게 불만을 품고, 불순한 조짐이 서울과 지방에서 싹텄고,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군대를 일으켜 경기도에 미쳤다. 흉악한 세력이 난을 일으켜 300년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임금이 장전(帳殿) 임시로 꾸민 임금의 앉는 자리
에거둥하여주위를쳐다보면서탄식하기를,“나의문무신하중에누가이적을섬멸할수있는가.”라하였다.이때에신(臣)찬신(纘新)이금위영의장수〔禁廂〕로있었는데,모두장수로삼을만하다고하여드디어초토중군(招討中軍)으로칭하고왕명으로출정하여열달도되지않아이적을무찔렀다.개선(凱旋)한뒤분무공신(奮武功臣)으로책훈(策勳)되고자헌대부(資憲大夫)가되어함녕군(咸寧君)에봉해졌다.예에따라3대를추증하여,아버지대도호부군(大都護府君)을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績德補祚功臣)숭정대부(崇政大夫)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겸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事)세자이사(世子貳師)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함풍군(咸豊君)으로추증하였다.
(2판)
君/此府君衣履之蔵實 國西道坡州牧所謂雌䧺
山山下坐巽之原也咸寧旣以公事行屬尹承宣東
洙撰大碑以竪又謁銘于時左相金公在魯氏表之
墓前嗚呼 朝廷所以褒寵勤勵臣子之意不其厚
哉人孰無子公之子幹厥盅焉然而猶未也迺以誌
幽之文托不侫顧寡陋於公不杇圖有何足重輕特
與公以鑑湖先生同曾祖忝爲兄弟行斯足以紀世
德必詳且謂傳後貴摭實一家言爲可重則其亦不
匱之孝思也忠於國而孝於親卽吾家相傳者而咸
寧有所受樹立如彼又勤墓道事欲其無憾若玆玆(將樂爲之文文不文奚論)
이곳은 부군(府君)의 묘소이다. 실로 나라의 서쪽 길 파주목(坡州牧) 이른바 자웅산(雌䧺山) 산 아래 손(巽) 방향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함녕(咸寧: 박찬신)이 이미 공의 행적을 승지(承旨) 윤동수(尹東洙)에게 부탁하여 큰 비석의 글을 지어 세웠고 또 묘갈명(墓碣銘)은 이때 좌의정 김공(金公) 재로(在魯)가 묘 앞에 지었다.
오호, 조정이 신하를 포상하고 격려하는 뜻이 어찌 두텁지 않는가. 누군들 자식이 없겠는가마는 공의 아들이 그 대략을 갖추었으나,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겨 이에 묘지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공보다 견식이 부족하여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데, 어찌 공을 평가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공과 함께 감호선생(鑑湖先生)이 증조가 되고 모두 형제 항렬이니 조상의 세덕(世德)을 자세히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르기를 “후세들에게 전하는 일은 조상의 아름다운 기록을 모으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참으로 일가(一家)의 말을 중하게 여길 만하다.” 하였으니, 그 역시 끝없는 효심이 아니겠는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 바로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이다. 함녕이 나라에 공을 세운 것이 저와 같고 또 부모의 묘소를 단장하는 일을 정성을 다하는 것에 유감이 없고자 하였다. 이에 내가 즐겁게 묘지문을 지으니, 제대로 된 문장인지 아닌지를 어찌 논하겠는가?
(3판)
將樂爲之文文不文奚論/我鮮數世家必朴氏居先
謹按世譜信然盖以其系出於赫居世王漢宣帝五
鳳元年王都辰韓國號徐羅伐歷南解儒理兩王傳
昔氏爲脫解王王分封我朴氏宗族八公子爲速含
君者卽其一而繩繩至屢千年不絶也速含郡在新
羅改爲天嶺至高麗改爲含陽後又改含爲咸公是
爲咸陽人遠祖諱善仕高麗禮部尙書嗣是有諱仁
挺三重都僉議司事諱信淸禮部尙書諱允禎戶部
尙書諱臣㽔吏部尙書諱之秀密直副使諱㺮判三
事正言諱仁桂兵部尙書死綏旌閭事載東史/諱元
우리나라의 몇몇 세가(世家)는 박씨가 가장 먼저 시작하였다. 삼가 세보(世譜)를 살펴보면 믿을 만 하니, 대개 그 선계(先系)가 혁거세왕(赫居世王)에서 나왔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에, 왕이 진한(辰韓)에 도읍하고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 남해왕(南解王)‧유리왕(儒理王) 두 왕을 거친 뒤 석씨(昔氏)에게 왕위가 전해져 탈해왕(脫解王)이 되었고, 왕이 우리 박씨 종족(朴氏宗族)의 8공자를 분봉(分封)하였다. 속함군(速含君)은 바로 그 중 하나인데, 계속 이어져 수천 년이 되도록 끊어지지 않았다. 속함군(速含郡)은 신라 때에는 천령(天嶺)으로 고쳤고, 고려(高麗)에 이르러서는 함양(含陽)으로 고쳤고 뒤에 또 함(含)을 고쳐 함(咸)이라 하였다. 공은 본관이 함양이다.
원조(遠祖) 선(善)은 고려에서 벼슬살이를 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다. 그의 뒤를 이은 인물로 삼중도첨의사사(三重都僉議司事) 인정(仁挺), 예부상서 신청(信淸), 호부상서(戶部尙書) 윤정(允禎), 이부상서(吏部尙書) 신유(臣㽔), 밀직부사(密直副使) 지수(之秀), 판부사(判三事) 정언(正言) 우(㺮), 병부상서(兵部尙書) 인계(仁桂)<죽음으로 절의를 지켜 정려(旌閭)된 일이 동사(東史)에 실려 있다.>
(4판)
(諱元)廉戶部尙書諱德祥府使贈戶部尙書是生諱習
入我 朝判兵曹 英廟朝罣文罔與國舅沈相國
溫同被禍寃死子諱義孫登第以殿中御史坐廢自
盡未幾 命復官伸叙子諱信童從仕郞 贈吏曹
參判子諱中儉成均生員 贈吏曹判書壻于 恭
靖大王駙馬授秉節司猛囙治命不題碣兩世貤贈
之及以孫大立公貰成貴也生員之季子諱世蓊選
翰苑吏曹參議又其季子諱名立官通禮院相禮是
儲望南臺廕階之最於公爲五世六世高祖諱知幾
幼及朴水巖枝華門學焉執親喪三年廬墓當/壬辰
호부상서 원렴(元廉), 부사(府使) 증 호부상서(贈戶部尙書) 덕상(德祥)이 있다.
덕상은 습(習)을 낳았는데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병조판서가 되었고 세종대에 법망에 걸려 국구(國舅) 상국(相國) 심온(沈溫)과 함께 화를 입고 원통하게 죽었다. 습의 아들 의손(義孫)은 과거에 합격하여 전중어사(殿中御史)를 지내다 연좌로 폐해져 스스로 죽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관직을 회복하고 원한을 풀어주고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있었다. 의손의 아들 신동(信童)은 종사랑(從仕郞)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신동의 아들 중검(中儉)은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종(定宗)의 부마(駙馬)의 사위가 되어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제수받고 사맹(司猛)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묘갈명을 만들지 못하였는데, 양세(兩世)가 거듭하여 추증을 받은 것은 손자 대립(大立) 때문이다. 생원(生員)의 계자(季子) 세옹(世蓊)은 한림원에 뽑혀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고, 또 세옹의 계자(季子) 명립(名立)이 관직이 통례원상예(通禮院相禮)에 이르렀고, 신망을 쌓아 남대(南臺)가 되었는데 음직으로 오른 관직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다. 공의 5대조, 6대조이다.
고조 지기(知幾)는 어려서 박수암공(朴水巖公)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배웠고, 부모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5판)
(壬辰)倭變白衣扈 駕龍灣牛溪成先生重其忠孝大節
侍以季孟間至有約居同井在其師友錄中筮寢郞
陞司贍寺奉事年纔踰强仕而終君子惜之曾祖諱
由寬少從李白沙恒福游長爲月沙李公廷龜所稱
賞妻以舅氏女上所稱鑑湖先生是已雅有士林重
望首發栗谷李先生神道之論及昏朝廢 母論起
與大谷南判書銑竹窓李承旨時稷諸友日講遐遯
計遂南下居于嶺之金陵 仁廟改玉首除郵丞招
䋱之及至 賜對便殿盖曠絶事人謂儒者至榮外
知豊德郡事內歷京兆小尹以壽陞通政階甞再錄(從勳)
임진왜란을 당하여 백의로 의주(義州)까지 임금의 행차를 호위하였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이 그의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절개를 중하게 여겨 대우하면서 같은 동리에 살자고 약조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 사우록(師友錄)에 나와 있다. 중년에 능참봉으로 벼스에 나아가 사섬시봉사(司贍寺奉事)에 올랐는데 나이가 겨우 마흔 살이 넘어 세상을 떠났으니 군자들이 애석해하였다.
증조 유관(由寬)은 어려서부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따라 배웠고 커서는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칭찬을 받아 장인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감호선생(鑑湖先生)으로 불렸으며 사림(士林)들에게 중한 기대를 받았다. 가장 먼저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先生)의 신도(神道) 문제를 논하였다. 혼조(昏朝)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대곡(大谷) 판서(判書) 남선(南銑)과 죽창(竹窓) 승지(承旨) 이시직(李時稷) 제우(諸友)들과 함께 날마다 먼 지방으로 은둔할 계획을 세워 드디어 남하하여 영남의 금릉(金陵)에 살게 되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가장 먼저 찰방직에 임명되어 편전(便殿)에서 임금을 직접 만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대개 고금에 드문 일로 사람들이 유자의 지극한 영광으로 일컬었다. 외직으로는 풍덕군수(豊德郡守), 내직으로는 경조소윤(京兆小尹)을 지냈고 장수한 것 때문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일찍이 두 번이나 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6판)
從勳 /贈官至左參贊祖諱乃亨性骯髒志倜儻有
弟三人冠冕聯翩獨不屑擧業聞博而識敏爲一時
望人考尙絅寔參贊公嗣孫吾先子甞曰堂兄才憂
行備不幸而短命也然坡平名閥有淑德女歸以甲
午十一月十一日生公公生而再奉板輿養以專城
歿而以咸寧爲子 贈典及於公考若祖祖以左承
旨考以大司憲夫人各視其品吁其盛矣哉妣尹氏
縣監 贈承旨勛擧女八松文正公煌之孫也公諱
宗發字而能早孤靡依內舅執義公抃愍其稟超常
而擧過時率養敎飾于家凡十年/仍從內兄副學公
추증된 관직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내형(乃亨)은 성품이 곧고 지조가 대범하였다. 동생 세 사람은 관직에 잇달아 나아갔지만, 유독 과거에 힘쓰지 않고 학문을 닦아 견문이 넒고 식견이 민첩하여 한 때의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아버지 상경(尙絅)은 참찬공(參贊公)의 사손(嗣孫)이다. 내 아버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당형(堂兄)의 재주가 뛰어나고 행실도 반듯하였는데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났다.” 라 하였다. 그러나 파평 윤씨(坡平尹氏)라는 이름난 가문의 정숙한 덕을 가진 여자에게 장가가서 갑오년(1654) 11월 1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생전에는 다시 부모를 모시고 지방 수령으로 봉양하고, 죽어서는 함녕의 공으로 인해 자식의 공으로 추증되는 은전이 공의 아버지 및 할아버지에 미쳤다. 할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로, 아버지는 대사헌(大司憲)으로 추증되었고, 부인은 각각 그 품직에 맞게 추증되었다. 아, 그 성하도다. 어머니 윤씨(尹氏)는 현감(縣監) 증 승지(贈承旨) 훈거(勛擧)의 딸이고, 팔송(八松) 문정공(文正公) 황(煌)의 손녀이다.
공의 이름은 종발(宗發), 자(字)는 이능(而能)이다. 일찍 아버지를 잃어 외숙 집의공(執義公) 윤변(尹抃)에게 의탁하였다. 집의공이 그의 타고난 자질을 불쌍하게 여겨 보통보다 넘겨 보살폈고, 집에서 키우면서 가르친 것이 10여년이었다.
(7판)
(仍從內兄副學公)敬敎受業由而出入於酉峯之門用力不怠文藝日
就人不謂寡婦孤兒而副學公勸投筆其意久屈公
車是惜勉從者亦恐家貧親老爲沒身恨非樂爲也
辛酉擢武科遲回末宦如南藥泉九萬崔明谷錫鼎
諸公一見無不以優文翰曉事務大加獎詡先後掌
東西銓惜其淹滯必欲收用至或姓名字七登一都
政政眼臺監秋郞間亦屢擬輒 天點不下其始發
軔見稱當路者如此才與命相仇又有如當時者屠
維禍作 坤聖遜位公意不樂築湖庄色擧時賊黯
主兵柄諉有戚誼招以別裨勢郞當難抗/公曰丈夫
이로 인해 종내형(從內兄: 외사촌형) 부제학공(副提學公) 윤경교(尹敬敎)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유봉(酉峯: 윤증)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학문에 힘쓰는 데 게으르지 않아 문예가 날로 성취되어, 사람들이 ‘과부의 자식’이라 놀리지 않았다. 부제학공이 붓을 던지고 무반직을 권하였는데 그 뜻이 오랫동안 공거업(公車業)에 매여 있는 것이 안타깝고, 힘써 따르던 공도 역시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가 연로하여 세상을 떠나 자신에게 한이 될까 두려워하여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유년(1681)에 무과에 급제하여 늦게까지 말단 관직을 맴돌았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같은 제공(諸公)이 한번 보고 문장이 뛰어나고 사무(事務)를 잘하는 것으로 크게 칭찬하였다. 선후(先後)로 이조와 병조를 맡아, 그가 적체된 것을 애석하게 여겨 반드시 등용하고자 하였다. 간혹 성명이 올라오면 일곱에 한 번은 도목정사(都目政事)의 정안(政眼)에 올렸고, 대감(臺監: 사헌부 감찰관)과 추랑(秋郞: 형조 낭관)으로 올려 거듭 주의하였으나, 번번이 임금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벼슬하는 사람으로 당로자(當路者)의 칭찬을 받은 자가 이와 같이 재주와 운명이 서로 맞지 않았다. 또 이때에 화란이 일어나 중전이 왕비 자리를 양보하였다. 공의 즐겁게 여기지 않아 호서지방에 농막을 짓고 떠나려는데, 적들이 몰래 병권을 장악하고서 번거롭게 척분으로 별비(別裨)로 불러 형세상 거절하기 어려웠다.
(8판)
(公曰丈夫)寧死耳義不忍此時出彼知不可屈而止先是李完
寧母夫人以從親抵書公大夫人曰吾兒方典午兄
盍令先達做官大夫人勸之公公曰公擧則已私謁
非所志竟不肯及其自西謫被拿始以親誼迎問路
左完寧握手歎曰不炎凉孰如君有人如君曾不能
用宜有今日行吾將媿服而死此不侫少在家庭間
耳剽而心服者雖不載他文字亦安敢不書以比惇
史其善自鞱晦不趍勢利多類此甲戌 中壺光復
位著更新始以武兼宣傳官拜中樞都事旋移都摠
府丙子出監興德縣治具畢中肯綮萎暍膏醒數年(民大和)
공이 이르기를, “장부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의리로 차마 이런 때에 벼슬에 나갈 수 없다.” 라 하였다. 저들이 굽힐 수 없음을 알고 그만두었다.
이보다 앞서, 이 완령(完寧: 이사명李師命)의 어머니가 종친(從親)으로 공의 어머니에게 글을 쓰기를, “내 아이가 인사를 맡고 있는데 언니는 어찌하여 선달(先達)에게 벼슬을 하게 하지 않는가.” 라 하였다. 어머니가 공에게 권하니, 공이 말하기를, “공거(公擧)는 따를 뿐이지, 사사로이 벼슬자리를 구하는 것은 저의 뜻이 아닙니다.”라면서 끝내 옳게 여기지 않았다.. 이 완령이 서쪽으로 유배갈 때, 비로소 친척의 정분으로 문안인사를 하였다. 길가에서 완령이 손을 잡고서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세력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기를 누가 자네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자네 같은 사람을 등용하지 않아 오늘날의 이런 귀양 가는 처지가 되었으니 내가 장차 부끄러움을 안고 죽겠구나.” 라 하였다. 이것이 내가 어려서 집에서 있을 때 직접 듣고 깊이 감복하였던 것이다. 비록 다른 글을 싣지 않지만, 이 역시 어찌 감히 쓰지 않고서 도타운 사적을 따르겠는가? 그 선함이 스스로 감추고 이익을 쫓지 않았으니, 대개 이와 같았다.
갑술년(1694) 중전이 다시 왕비의 자리를 회복되어 정사가 새로워졌을 때 처음으로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으로 중추도사(中樞都事)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도총부(都摠府)로 자리를 옮겼다. 병자년(1696) 흥덕현감(興德縣監)이 되었는데, 현이 잘 다스려지고, 긍계(肯綮)에 맞아서 수년 만에 백성들이 크게 화평해졌다.
(9판)
民大和/有去思碑遺愛詞至今頌其淸政惠德以崇
奉焉還入摠府陞經歷被備局選爲郞庚辰拜昌原
府使將 陞辭諸宰函稱曰不惟筆翰瞻敏且能綜
解機務安得復如此君來旣至革弊以便民殫誠以
奉公爲政一於律已闔境愛悅比興民無損辛巳移
授順天營將陞資邑人惜去引借寇故事訴道臣以
治最請仍任于 朝時則忠憲公金相國構爲夏官
長奏曰 孝廟設置營將意甚重漢宣帝以治郡高
第璽書增秩今以有聲績仍舊官非所以獎進 上
可其奏未抵任內移禁軍將將行有詩曰/兩歲臨民
거사비(去思碑)와 유애사(遺愛詞)가 있는데, 지금까지 공의 맑은 정치와 베푼 덕을 기리고 있다. 돌아와 총부(摠府)에 들어가 경력(經歷)으로 승진하여 비변사(備邊司)의 낭관이 되었다.
경진년(1700) 창원부사(昌原府使)에 임명되었다. 장차 여러 재상들에게 사직하는 인사를 하는 데, 재상들이 칭찬하기를, “글 쓰는 것이 민첩하고, 또 기무(機務)를 잘 이해하였으니, 어찌 다시 자네 같은 사람을 얻겠는가.” 라 하였다. 부임한 뒤에는 폐단을 혁파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정성을 다하여 공무를 받들었다. 정사를 보는 데 자신을 검속하는 것에 한결같아, 경내의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신사년(1701) 순천영장(順天營將)으로 옮겨 임명되었는데, 자급이 올라 임지를 떠나게 되었다. 읍인(邑人)이 떠나는 것을 애석히 여겨 도적에 관한 고사(故事)를 인용하면서 호소하였다. 감사는 다스린 공적이 가장 뛰어났다는 이유로 계속 영장직을 맡길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당시 충헌공(忠憲公) 상국(相國) 김구(金構)가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상주하기를, “효종(孝宗) 임금이 영장(營將)을 설치한 뜻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漢)나라 선제(宣帝)는 군현을 잘 다스린 순서로 관질(官秩)을 높였습니다. 지금 명성과 실적이 있다는 이유로 구관을 거듭 임명하는 것은 권장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라 하였다. 임금이 그 상주가 옳다고 여겼다. 임내(任內)의 사람들이 더 이상 막지 못하여 금군장(禁軍將)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장차 떠나면서 시를 남겼다.
(9판)
(兩歲臨民)日徒勞撫字心秋風歸去路匹馬載孤琴卽此一絶
可驗公平生宜昌人之攀轅不得則刻石追思如興
民也辛巳丁大夫人憂哀毁幾不勝服甫闋而棄諸
孤是甲申六月十七日用是年八月葬焉公九歲遭
承重王考喪執禮如成人家窮約不事産業唯致養
偏慈竭其力起居有愆輒湯藥必親夙夜不離側奉
先尤謹且誠祭需不專以豊侈務爲蠲潔自奉亦未
甞襲裘重肉家人爲之憂則曰家本淸素弊袍何害
仍遺戒云吾歿後歛殯之具奠獻之儀務從間儉以
遵吾志待人無畦畛崖岸接親戚處僚友常謙挹遜(順)
두 해 동안 백성을 대한 날에
兩歲臨民日
다만 노심초사하며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네,
徒勞撫字心
가을바람에 돌아가는 길에
秋風歸去路
말 한 마리에다 외로운 거문고를 실었다네.
匹馬載孤琴
바로 이 한 구절이 공의 평생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공이 수령직을 그만두고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돌에 새겨 공을 생각하였다. 신사년(1701)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나무 슬퍼서 거의 상례를 다 치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이 해가 갑신년(1704) 6월 17일이다. 이해 8월에 장사지냈다.
공이 9세에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아버지의 상(喪)에 치르는데 예(禮)를 집행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생업을 일삼지 않았고, 오직 홀로된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그 힘을 다하였다. 어머니의 건강이 나쁘면 번번이 탕약(湯藥)은 반드시 직접 올리고,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데는 더욱 몸을 삼갔다. 또 제수祭需를 정성스럽게 준비하였는데,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제물보다 깨끗한 제물을 올리는 데 힘썼다. 자신을 돌보는 것 역시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거나 고기 먹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그 때문에 근심하면, 공이 “집안의 근본이 본래 맑은데, 해진 옷이 무슨 해가 되겠느냐.”고 말하였다. 이어서 자녀들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은 뒤, 염습하는 기구와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간단하고 검소한 것에 힘써 나의 뜻을 따르라.”고 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 경계를 두지 않았고, 친척을 대하거나 친구에 대할 때 늘 겸양하고 공손히 따랐다.
(11판)
順/子第巾襪不整不敢見閨門肅若朝典噫苟非性
孝勤而姿沉毅鮮或有能於是者人謂之武名儒行
也亦宜乃如之人而年位嗇於所賦識者將不能無
疑於天則奚特不侫爲門戶嘅惜至其歸成於後而
天道之定信有所驗矣夫人公山鄭氏學生興周之
女生于丙申正月十三日壬子于歸癸卯六月十六
日卒于季子興海郡任所後公十九年而祔葬墓左
從 贈貞敬夫人婦德純備自主中饋事姑一心以
孝待妯娌撫婢㜎各盡恩義若其白手成家凡婦人
之所難能而特一餘事隣䣊咸稱服焉擧三男二女
집안 자제의 옷차림이 바르지 않으면 감히 규문(閨門)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엄숙하기가 마치 조정의 법도와 같았다.
아, 참으로 성품이 효성스럽고 부지런하면서 모습이 진중하고 굳세지 않으면서, 이와 같이 잘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람들이 ‘무장(武將)의 명성에 유자(儒者)의 행실’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인데도 수명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보다 훨씬 적어서, 식자(識者)들이 하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다만 내가 집안사람이서 그가 세상을 떠나고 큰 경사가 있음을 애석하게 여기겠는가? 천도(天道)가 정해진 것은 참으로 징험할 수 있다.
부인(夫人) 공산 정씨(公山鄭氏)는 학생(學生) 흥주(興周)의 딸이다. 병신년(1656) 1월 13일에 태어나 임자년(1672)에 시집와서, 계묘년(1723) 6월 16일에 막내아들의 흥해군(興海郡) 임지에서 공보다 19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공의 묘 왼쪽에 합장되었고, 남편을 따라 정경부인(贈貞敬夫人)에 증직되었다. 부인의 덕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음식 만들기 같은 집안일을 직접 주관하였다. 시어머니를 섬기는 데 한결같이 효도하는 마음이었다. 동서를 대할 때나 비복을 다스릴 때 각각 은혜와 의리를 다하였다. 빈손으로 가세를 일으켰으니 무릇 부인이 하기 어려운 것인데, 나머지 일도 한결같아 이웃이 모두 칭찬하고 감복하였다. 아들 셋, 딸 둘을 두었다.
(12판)
男長卽咸寧君屢官節度使今漢城府判尹子台煥
被別薦以南行宣傳官登武科遷歷內職時補順川
郡庶子台燁台烱台煒次曰再新嘉善吉州牧防禦
使繼后子台熽庶子台煜季曰泰新嘉善金海都護
府使子台㷜台炡二女幼二女士人崔龍翼李廷耈
其婿也崔有子景文希文女李匡載宋翼皓李有子
道徵女南益周側出男曰弼新一子台熺記昔不侫
方勝冠公時頻繁以吾先君子在輒問所讀期勉者
重至今三十餘年而父兄長老無一之存公且墓木
已拱而顧亦孤露無成白首於世乃能誌公之墓/嗚
장남은 바로 함녕군 찬신인데 절도사(節度使)에 거듭 임명되었다가, 지금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다. 찬신의 아들 태환(台煥)은 특별히 천거되어 남행선전관(南行宣傳官)으로 무과에 급제하였고, 내직(內職)을 거쳐 지금은 순천군수(順川郡守)에 임명되었다. 찬신의 서자(庶子)는 태엽(台燁)·태형(台烱)·태위(台煒)가 있다. 차남 재신(再新)은 가선대부(嘉善) 길주목방어사(吉州牧防禦使)이다. 재신의 계후자(繼后子)는 태소(台熽)이고, 서자(庶子)는 태욱(台煜)이다. 삼남 태신(泰新)은 가선대부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이다. 태신의 아들 태혁(台㷜)‧태정(台炡)이고, 딸 둘은 어리다. 딸 둘은 사인(士人) 최몽익(崔龍翼)과 이정구(李廷耈)에게 시집갔다. 최몽익의 아들은 경문(景文)과 희문(希文)이고, 딸은 이광재(李匡載)‧송익호(宋翼皓)에게 시집갔다. 이정구의 아들은 도징(道徵)이고 딸은 남익주(南益周)에게 시집갔다. 첩 소생 아들 필신(弼新)은 아들 하나가 있는데 태희(台熺)이다.
옛날 내가 막 젊었을 때 공이 자주 나의 아버지가 계시는 곳에 와서 자주 독서한 내용에 대해 묻고 힘써 행하기를 중하게 여겼다. 지금 30여년이 흘러 부형(父兄)과 장로(長老)들이 한 사람도 살아있지 않고, 공도 세상을 떠난 것도 묘소에 있는 나무가 한 아름일 정도로 지났다. 나도 역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으로 이룬 것이 없이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이에 공의 묘에 지문을 쓴다.
(13판)
(嗚)呼可悲也己銘曰
才之施於官者 惜一於十 壽之享其德者 嗟
半於百 結駟襲緋 不足爲公榮 樹石薦豆
不足爲公名 惟冢嗣之作于城兮 匪公之沒不
沒也歟 伊胤屬之傳箕裘兮 將公之食未食也
歟 劬于躬而燾厥後兮 理不忒 揚其美而藏
諸幽兮 視靡極
崇禎紀元後再己未秋再從弟行縣監斗益謹誌
오호!, 슬프구나. 명(銘) 한다.
재주를관직에서펼친것이
才之施於官者
열에하나정도이고
惜一於十
그덕을누린수명이
壽之享其德者
50살에지나지않네
嗟半於百
네마리말(結駟)과붉은비단(襲緋:벼슬길)이
結駟襲緋
공의영광이되기부족하고
不足爲公榮
비석을세우고제사를지내도
樹石薦豆
공의명성에는부족하다
不足爲公名
상속자(冢嗣)가 나라의 간성(干城)이 되었으니惟冢嗣之作于城兮
공이살아있거나죽었거나가문제가아니었네
匪公之沒不沒也歟
저자손이이어져선조를계승함이여
伊胤屬之傳箕裘兮
장차공이후손의밥을받고받지못함이아니겠는가?
將公之食未食也歟
몸소수고롭게하여그후손을비추었으니
劬于躬而燾厥後兮
이치가어긋남이없고,
理不忒
그아름다움을찬양하여유택에묘지를묻으니
揚其美而藏諸幽兮
살핌이다함이없구나.
視靡極
숭정(崇禎) 기원후 두 번째 기미년(1739) 가을 재종제(再從弟) 행 현감(行縣監) 두익(斗益)이 삼가 짓다.
(1판)
有明朝鮮國贈議政府左贊成咸豊君行通政大
夫昌原大都護府使朴公墓誌銘
我聖上卽位之越三年戊申春羣不逞蘖芽內外
起湖嶺通畿甸兇鋒稱亂三百年宗社殆呼吸間
上御帳殿顧瞻咨嗟曰惟予文武臣疇能殲此賊
者于時臣纘新在禁廂僉曰可遂號招討中軍 命
出征不旬月而鏖平之旣凱旋䇿奮武勳階資憲封
咸寧君推恩三代如例得贈其皇考大都護府君
爲純忠績德補祚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
判義禁府事世子貳師五衛都摠府都摠管咸豊(君)
(2판)
君/此府君衣履之蔵實 國西道坡州牧所謂雌䧺
山山下坐巽之原也咸寧旣以公事行屬尹承宣東
洙撰大碑以竪又謁銘于時左相金公在魯氏表之
墓前嗚呼 朝廷所以褒寵勤勵臣子之意不其厚
哉人孰無子公之子幹厥盅焉然而猶未也迺以誌
幽之文托不侫顧寡陋於公不杇圖有何足重輕特
與公以鑑湖先生同曾祖忝爲兄弟行斯足以紀世
德必詳且謂傳後貴摭實一家言爲可重則其亦不
匱之孝思也忠於國而孝於親卽吾家相傳者而咸
寧有所受樹立如彼又勤墓道事欲其無憾若玆玆(將樂爲之文文不文奚論)
(3판)
將樂爲之文文不文奚論/我鮮數世家必朴氏居先
謹按世譜信然盖以其系出於赫居世王漢宣帝五
鳳元年王都辰韓國號徐羅伐歷南解儒理兩王傳
昔氏爲脫解王王分封我朴氏宗族八公子爲速含
君者卽其一而繩繩至屢千年不絶也速含郡在新
羅改爲天嶺至高麗改爲含陽後又改含爲咸公是
爲咸陽人遠祖諱善仕高麗禮部尙書嗣是有諱仁
挺三重都僉議司事諱信淸禮部尙書諱允禎戶部
尙書諱臣㽔吏部尙書諱之秀密直副使諱㺮判三
事正言諱仁桂兵部尙書死綏旌閭事載東史/諱元
(4판)
(諱元)廉戶部尙書諱德祥府使贈戶部尙書是生諱習
入我 朝判兵曹 英廟朝罣文罔與國舅沈相國
溫同被禍寃死子諱義孫登第以殿中御史坐廢自
盡未幾 命復官伸叙子諱信童從仕郞 贈吏曹
參判子諱中儉成均生員 贈吏曹判書壻于 恭
靖大王駙馬授秉節司猛囙治命不題碣兩世貤贈
之及以孫大立公貰成貴也生員之季子諱世蓊選
翰苑吏曹參議又其季子諱名立官通禮院相禮是
儲望南臺廕階之最於公爲五世六世高祖諱知幾
幼及朴水巖枝華門學焉執親喪三年廬墓當/壬辰
(5판)
(壬辰)倭變白衣扈 駕龍灣牛溪成先生重其忠孝大節
侍以季孟間至有約居同井在其師友錄中筮寢郞
陞司贍寺奉事年纔踰强仕而終君子惜之曾祖諱
由寬少從李白沙恒福游長爲月沙李公廷龜所稱
賞妻以舅氏女上所稱鑑湖先生是已雅有士林重
望首發栗谷李先生神道之論及昏朝廢 母論起
與大谷南判書銑竹窓李承旨時稷諸友日講遐遯
計遂南下居于嶺之金陵 仁廟改玉首除郵丞招
䋱之及至 賜對便殿盖曠絶事人謂儒者至榮外
知豊德郡事內歷京兆小尹以壽陞通政階甞再錄(從勳)
(6판)
從勳 /贈官至左參贊祖諱乃亨性骯髒志倜儻有
弟三人冠冕聯翩獨不屑擧業聞博而識敏爲一時
望人考尙絅寔參贊公嗣孫吾先子甞曰堂兄才憂
行備不幸而短命也然坡平名閥有淑德女歸以甲
午十一月十一日生公公生而再奉板輿養以專城
歿而以咸寧爲子 贈典及於公考若祖祖以左承
旨考以大司憲夫人各視其品吁其盛矣哉妣尹氏
縣監 贈承旨勛擧女八松文正公煌之孫也公諱
宗發字而能早孤靡依內舅執義公抃愍其稟超常
而擧過時率養敎飾于家凡十年/仍從內兄副學公
(7판)
(仍從內兄副學公)敬敎受業由而出入於酉峯之門用力不怠文藝日
就人不謂寡婦孤兒而副學公勸投筆其意久屈公
車是惜勉從者亦恐家貧親老爲沒身恨非樂爲也
辛酉擢武科遲回末宦如南藥泉九萬崔明谷錫鼎
諸公一見無不以優文翰曉事務大加獎詡先後掌
東西銓惜其淹滯必欲收用至或姓名字七登一都
政政眼臺監秋郞間亦屢擬輒 天點不下其始發
軔見稱當路者如此才與命相仇又有如當時者屠
維禍作 坤聖遜位公意不樂築湖庄色擧時賊黯
主兵柄諉有戚誼招以別裨勢郞當難抗/公曰丈夫
(8판)
(公曰丈夫)寧死耳義不忍此時出彼知不可屈而止先是李完
寧母夫人以從親抵書公大夫人曰吾兒方典午兄
盍令先達做官大夫人勸之公公曰公擧則已私謁
非所志竟不肯及其自西謫被拿始以親誼迎問路
左完寧握手歎曰不炎凉孰如君有人如君曾不能
用宜有今日行吾將媿服而死此不侫少在家庭間
耳剽而心服者雖不載他文字亦安敢不書以比惇
史其善自鞱晦不趍勢利多類此甲戌 中壺光復
位著更新始以武兼宣傳官拜中樞都事旋移都摠
府丙子出監興德縣治具畢中肯綮萎暍膏醒數年(民大和)
(9판)
民大和/有去思碑遺愛詞至今頌其淸政惠德以崇
奉焉還入摠府陞經歷被備局選爲郞庚辰拜昌原
府使將 陞辭諸宰函稱曰不惟筆翰瞻敏且能綜
解機務安得復如此君來旣至革弊以便民殫誠以
奉公爲政一於律已闔境愛悅比興民無損辛巳移
授順天營將陞資邑人惜去引借寇故事訴道臣以
治最請仍任于 朝時則忠憲公金相國構爲夏官
長奏曰 孝廟設置營將意甚重漢宣帝以治郡高
第璽書增秩今以有聲績仍舊官非所以獎進 上
可其奏未抵任內移禁軍將將行有詩曰/兩歲臨民
(9판)
(兩歲臨民)日徒勞撫字心秋風歸去路匹馬載孤琴卽此一絶
可驗公平生宜昌人之攀轅不得則刻石追思如興
民也辛巳丁大夫人憂哀毁幾不勝服甫闋而棄諸
孤是甲申六月十七日用是年八月葬焉公九歲遭
承重王考喪執禮如成人家窮約不事産業唯致養
偏慈竭其力起居有愆輒湯藥必親夙夜不離側奉
先尤謹且誠祭需不專以豊侈務爲蠲潔自奉亦未
甞襲裘重肉家人爲之憂則曰家本淸素弊袍何害
仍遺戒云吾歿後歛殯之具奠獻之儀務從間儉以
遵吾志待人無畦畛崖岸接親戚處僚友常謙挹遜(順)
(11판)
順/子第巾襪不整不敢見閨門肅若朝典噫苟非性
孝勤而姿沉毅鮮或有能於是者人謂之武名儒行
也亦宜乃如之人而年位嗇於所賦識者將不能無
疑於天則奚特不侫爲門戶嘅惜至其歸成於後而
天道之定信有所驗矣夫人公山鄭氏學生興周之
女生于丙申正月十三日壬子于歸癸卯六月十六
日卒于季子興海郡任所後公十九年而祔葬墓左
從 贈貞敬夫人婦德純備自主中饋事姑一心以
孝待妯娌撫婢㜎各盡恩義若其白手成家凡婦人
之所難能而特一餘事隣䣊咸稱服焉擧三男二女
(12판)
男長卽咸寧君屢官節度使今漢城府判尹子台煥
被別薦以南行宣傳官登武科遷歷內職時補順川
郡庶子台燁台烱台煒次曰再新嘉善吉州牧防禦
使繼后子台熽庶子台煜季曰泰新嘉善金海都護
府使子台㷜台炡二女幼二女士人崔龍翼李廷耈
其婿也崔有子景文希文女李匡載宋翼皓李有子
道徵女南益周側出男曰弼新一子台熺記昔不侫
方勝冠公時頻繁以吾先君子在輒問所讀期勉者
重至今三十餘年而父兄長老無一之存公且墓木
已拱而顧亦孤露無成白首於世乃能誌公之墓/嗚
(13판)
(嗚)呼可悲也己銘曰
才之施於官者 惜一於十 壽之享其德者 嗟
半於百 結駟襲緋 不足爲公榮 樹石薦豆
不足爲公名 惟冢嗣之作于城兮 匪公之沒不
沒也歟 伊胤屬之傳箕裘兮 將公之食未食也
歟 劬于躬而燾厥後兮 理不忒 揚其美而藏
諸幽兮 視靡極
崇禎紀元後再己未秋再從弟行縣監斗益謹誌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증 의정부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 함풍군(咸豊君) 행 통정대부(行通政大夫) 창원대도호부사(昌原大都護府使) 박공(朴公) 묘지명(墓誌銘)
우리 성상(聖上, 영조)이 왕위에 즉위한 지 3년이 더 지난 무신년(1728) 봄에, 무리들이 임금에게 불만을 품고, 불순한 조짐이 서울과 지방에서 싹텄고,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군대를 일으켜 경기도에 미쳤다. 흉악한 세력이 난을 일으켜 300년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임금이 장전(帳殿) 임시로 꾸민 임금의 앉는 자리
에거둥하여주위를쳐다보면서탄식하기를,“나의문무신하중에누가이적을섬멸할수있는가.”라하였다.이때에신(臣)찬신(纘新)이금위영의장수〔禁廂〕로있었는데,모두장수로삼을만하다고하여드디어초토중군(招討中軍)으로칭하고왕명으로출정하여열달도되지않아이적을무찔렀다.개선(凱旋)한뒤분무공신(奮武功臣)으로책훈(策勳)되고자헌대부(資憲大夫)가되어함녕군(咸寧君)에봉해졌다.예에따라3대를추증하여,아버지대도호부군(大都護府君)을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績德補祚功臣)숭정대부(崇政大夫)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겸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事)세자이사(世子貳師)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함풍군(咸豊君)으로추증하였다.
이곳은 부군(府君)의 묘소이다. 실로 나라의 서쪽 길 파주목(坡州牧) 이른바 자웅산(雌䧺山) 산 아래 손(巽) 방향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함녕(咸寧: 박찬신)이 이미 공의 행적을 승지(承旨) 윤동수(尹東洙)에게 부탁하여 큰 비석의 글을 지어 세웠고 또 묘갈명(墓碣銘)은 이때 좌의정 김공(金公) 재로(在魯)가 묘 앞에 지었다.
오호, 조정이 신하를 포상하고 격려하는 뜻이 어찌 두텁지 않는가. 누군들 자식이 없겠는가마는 공의 아들이 그 대략을 갖추었으나,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겨 이에 묘지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공보다 견식이 부족하여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데, 어찌 공을 평가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공과 함께 감호선생(鑑湖先生)이 증조가 되고 모두 형제 항렬이니 조상의 세덕(世德)을 자세히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르기를 “후세들에게 전하는 일은 조상의 아름다운 기록을 모으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참으로 일가(一家)의 말을 중하게 여길 만하다.” 하였으니, 그 역시 끝없는 효심이 아니겠는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 바로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이다. 함녕이 나라에 공을 세운 것이 저와 같고 또 부모의 묘소를 단장하는 일을 정성을 다하는 것에 유감이 없고자 하였다. 이에 내가 즐겁게 묘지문을 지으니, 제대로 된 문장인지 아닌지를 어찌 논하겠는가?
우리나라의 몇몇 세가(世家)는 박씨가 가장 먼저 시작하였다. 삼가 세보(世譜)를 살펴보면 믿을 만 하니, 대개 그 선계(先系)가 혁거세왕(赫居世王)에서 나왔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에, 왕이 진한(辰韓)에 도읍하고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 남해왕(南解王)‧유리왕(儒理王) 두 왕을 거친 뒤 석씨(昔氏)에게 왕위가 전해져 탈해왕(脫解王)이 되었고, 왕이 우리 박씨 종족(朴氏宗族)의 8공자를 분봉(分封)하였다. 속함군(速含君)은 바로 그 중 하나인데, 계속 이어져 수천 년이 되도록 끊어지지 않았다. 속함군(速含郡)은 신라 때에는 천령(天嶺)으로 고쳤고, 고려(高麗)에 이르러서는 함양(含陽)으로 고쳤고 뒤에 또 함(含)을 고쳐 함(咸)이라 하였다. 공은 본관이 함양이다.
원조(遠祖) 선(善)은 고려에서 벼슬살이를 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다. 그의 뒤를 이은 인물로 삼중도첨의사사(三重都僉議司事) 인정(仁挺), 예부상서 신청(信淸), 호부상서(戶部尙書) 윤정(允禎), 이부상서(吏部尙書) 신유(臣㽔), 밀직부사(密直副使) 지수(之秀), 판부사(判三事) 정언(正言) 우(㺮), 병부상서(兵部尙書) 인계(仁桂)<죽음으로 절의를 지켜 정려(旌閭)된 일이 동사(東史)에 실려 있다.>
호부상서 원렴(元廉), 부사(府使) 증 호부상서(贈戶部尙書) 덕상(德祥)이 있다.
덕상은 습(習)을 낳았는데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병조판서가 되었고 세종대에 법망에 걸려 국구(國舅) 상국(相國) 심온(沈溫)과 함께 화를 입고 원통하게 죽었다. 습의 아들 의손(義孫)은 과거에 합격하여 전중어사(殿中御史)를 지내다 연좌로 폐해져 스스로 죽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관직을 회복하고 원한을 풀어주고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있었다. 의손의 아들 신동(信童)은 종사랑(從仕郞)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신동의 아들 중검(中儉)은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종(定宗)의 부마(駙馬)의 사위가 되어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제수받고 사맹(司猛)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묘갈명을 만들지 못하였는데, 양세(兩世)가 거듭하여 추증을 받은 것은 손자 대립(大立) 때문이다. 생원(生員)의 계자(季子) 세옹(世蓊)은 한림원에 뽑혀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고, 또 세옹의 계자(季子) 명립(名立)이 관직이 통례원상예(通禮院相禮)에 이르렀고, 신망을 쌓아 남대(南臺)가 되었는데 음직으로 오른 관직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다. 공의 5대조, 6대조이다.
고조 지기(知幾)는 어려서 박수암공(朴水巖公)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배웠고, 부모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백의로 의주(義州)까지 임금의 행차를 호위하였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이 그의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절개를 중하게 여겨 대우하면서 같은 동리에 살자고 약조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 사우록(師友錄)에 나와 있다. 중년에 능참봉으로 벼스에 나아가 사섬시봉사(司贍寺奉事)에 올랐는데 나이가 겨우 마흔 살이 넘어 세상을 떠났으니 군자들이 애석해하였다.
증조 유관(由寬)은 어려서부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따라 배웠고 커서는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칭찬을 받아 장인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감호선생(鑑湖先生)으로 불렸으며 사림(士林)들에게 중한 기대를 받았다. 가장 먼저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先生)의 신도(神道) 문제를 논하였다. 혼조(昏朝)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대곡(大谷) 판서(判書) 남선(南銑)과 죽창(竹窓) 승지(承旨) 이시직(李時稷) 제우(諸友)들과 함께 날마다 먼 지방으로 은둔할 계획을 세워 드디어 남하하여 영남의 금릉(金陵)에 살게 되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가장 먼저 찰방직에 임명되어 편전(便殿)에서 임금을 직접 만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대개 고금에 드문 일로 사람들이 유자의 지극한 영광으로 일컬었다. 외직으로는 풍덕군수(豊德郡守), 내직으로는 경조소윤(京兆小尹)을 지냈고 장수한 것 때문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일찍이 두 번이나 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추증된 관직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내형(乃亨)은 성품이 곧고 지조가 대범하였다. 동생 세 사람은 관직에 잇달아 나아갔지만, 유독 과거에 힘쓰지 않고 학문을 닦아 견문이 넒고 식견이 민첩하여 한 때의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아버지 상경(尙絅)은 참찬공(參贊公)의 사손(嗣孫)이다. 내 아버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당형(堂兄)의 재주가 뛰어나고 행실도 반듯하였는데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났다.” 라 하였다. 그러나 파평 윤씨(坡平尹氏)라는 이름난 가문의 정숙한 덕을 가진 여자에게 장가가서 갑오년(1654) 11월 1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생전에는 다시 부모를 모시고 지방 수령으로 봉양하고, 죽어서는 함녕의 공으로 인해 자식의 공으로 추증되는 은전이 공의 아버지 및 할아버지에 미쳤다. 할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로, 아버지는 대사헌(大司憲)으로 추증되었고, 부인은 각각 그 품직에 맞게 추증되었다. 아, 그 성하도다. 어머니 윤씨(尹氏)는 현감(縣監) 증 승지(贈承旨) 훈거(勛擧)의 딸이고, 팔송(八松) 문정공(文正公) 황(煌)의 손녀이다.
공의 이름은 종발(宗發), 자(字)는 이능(而能)이다. 일찍 아버지를 잃어 외숙 집의공(執義公) 윤변(尹抃)에게 의탁하였다. 집의공이 그의 타고난 자질을 불쌍하게 여겨 보통보다 넘겨 보살폈고, 집에서 키우면서 가르친 것이 10여년이었다.
이로 인해 종내형(從內兄: 외사촌형) 부제학공(副提學公) 윤경교(尹敬敎)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유봉(酉峯: 윤증)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학문에 힘쓰는 데 게으르지 않아 문예가 날로 성취되어, 사람들이 ‘과부의 자식’이라 놀리지 않았다. 부제학공이 붓을 던지고 무반직을 권하였는데 그 뜻이 오랫동안 공거업(公車業)에 매여 있는 것이 안타깝고, 힘써 따르던 공도 역시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가 연로하여 세상을 떠나 자신에게 한이 될까 두려워하여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유년(1681)에 무과에 급제하여 늦게까지 말단 관직을 맴돌았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같은 제공(諸公)이 한번 보고 문장이 뛰어나고 사무(事務)를 잘하는 것으로 크게 칭찬하였다. 선후(先後)로 이조와 병조를 맡아, 그가 적체된 것을 애석하게 여겨 반드시 등용하고자 하였다. 간혹 성명이 올라오면 일곱에 한 번은 도목정사(都目政事)의 정안(政眼)에 올렸고, 대감(臺監: 사헌부 감찰관)과 추랑(秋郞: 형조 낭관)으로 올려 거듭 주의하였으나, 번번이 임금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벼슬하는 사람으로 당로자(當路者)의 칭찬을 받은 자가 이와 같이 재주와 운명이 서로 맞지 않았다. 또 이때에 화란이 일어나 중전이 왕비 자리를 양보하였다. 공의 즐겁게 여기지 않아 호서지방에 농막을 짓고 떠나려는데, 적들이 몰래 병권을 장악하고서 번거롭게 척분으로 별비(別裨)로 불러 형세상 거절하기 어려웠다.
공이 이르기를, “장부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의리로 차마 이런 때에 벼슬에 나갈 수 없다.” 라 하였다. 저들이 굽힐 수 없음을 알고 그만두었다.
이보다 앞서, 이 완령(完寧: 이사명李師命)의 어머니가 종친(從親)으로 공의 어머니에게 글을 쓰기를, “내 아이가 인사를 맡고 있는데 언니는 어찌하여 선달(先達)에게 벼슬을 하게 하지 않는가.” 라 하였다. 어머니가 공에게 권하니, 공이 말하기를, “공거(公擧)는 따를 뿐이지, 사사로이 벼슬자리를 구하는 것은 저의 뜻이 아닙니다.”라면서 끝내 옳게 여기지 않았다.. 이 완령이 서쪽으로 유배갈 때, 비로소 친척의 정분으로 문안인사를 하였다. 길가에서 완령이 손을 잡고서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세력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기를 누가 자네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자네 같은 사람을 등용하지 않아 오늘날의 이런 귀양 가는 처지가 되었으니 내가 장차 부끄러움을 안고 죽겠구나.” 라 하였다. 이것이 내가 어려서 집에서 있을 때 직접 듣고 깊이 감복하였던 것이다. 비록 다른 글을 싣지 않지만, 이 역시 어찌 감히 쓰지 않고서 도타운 사적을 따르겠는가? 그 선함이 스스로 감추고 이익을 쫓지 않았으니, 대개 이와 같았다.
갑술년(1694) 중전이 다시 왕비의 자리를 회복되어 정사가 새로워졌을 때 처음으로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으로 중추도사(中樞都事)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도총부(都摠府)로 자리를 옮겼다. 병자년(1696) 흥덕현감(興德縣監)이 되었는데, 현이 잘 다스려지고, 긍계(肯綮)에 맞아서 수년 만에 백성들이 크게 화평해졌다.
거사비(去思碑)와 유애사(遺愛詞)가 있는데, 지금까지 공의 맑은 정치와 베푼 덕을 기리고 있다. 돌아와 총부(摠府)에 들어가 경력(經歷)으로 승진하여 비변사(備邊司)의 낭관이 되었다.
경진년(1700) 창원부사(昌原府使)에 임명되었다. 장차 여러 재상들에게 사직하는 인사를 하는 데, 재상들이 칭찬하기를, “글 쓰는 것이 민첩하고, 또 기무(機務)를 잘 이해하였으니, 어찌 다시 자네 같은 사람을 얻겠는가.” 라 하였다. 부임한 뒤에는 폐단을 혁파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정성을 다하여 공무를 받들었다. 정사를 보는 데 자신을 검속하는 것에 한결같아, 경내의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신사년(1701) 순천영장(順天營將)으로 옮겨 임명되었는데, 자급이 올라 임지를 떠나게 되었다. 읍인(邑人)이 떠나는 것을 애석히 여겨 도적에 관한 고사(故事)를 인용하면서 호소하였다. 감사는 다스린 공적이 가장 뛰어났다는 이유로 계속 영장직을 맡길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당시 충헌공(忠憲公) 상국(相國) 김구(金構)가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상주하기를, “효종(孝宗) 임금이 영장(營將)을 설치한 뜻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漢)나라 선제(宣帝)는 군현을 잘 다스린 순서로 관질(官秩)을 높였습니다. 지금 명성과 실적이 있다는 이유로 구관을 거듭 임명하는 것은 권장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라 하였다. 임금이 그 상주가 옳다고 여겼다. 임내(任內)의 사람들이 더 이상 막지 못하여 금군장(禁軍將)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장차 떠나면서 시를 남겼다.
두 해 동안 백성을 대한 날에
兩歲臨民日
다만 노심초사하며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네,
徒勞撫字心
가을바람에 돌아가는 길에
秋風歸去路
말 한 마리에다 외로운 거문고를 실었다네.
匹馬載孤琴
바로 이 한 구절이 공의 평생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공이 수령직을 그만두고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돌에 새겨 공을 생각하였다. 신사년(1701)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나무 슬퍼서 거의 상례를 다 치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이 해가 갑신년(1704) 6월 17일이다. 이해 8월에 장사지냈다.
공이 9세에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아버지의 상(喪)에 치르는데 예(禮)를 집행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생업을 일삼지 않았고, 오직 홀로된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그 힘을 다하였다. 어머니의 건강이 나쁘면 번번이 탕약(湯藥)은 반드시 직접 올리고,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데는 더욱 몸을 삼갔다. 또 제수祭需를 정성스럽게 준비하였는데,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제물보다 깨끗한 제물을 올리는 데 힘썼다. 자신을 돌보는 것 역시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거나 고기 먹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그 때문에 근심하면, 공이 “집안의 근본이 본래 맑은데, 해진 옷이 무슨 해가 되겠느냐.”고 말하였다. 이어서 자녀들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은 뒤, 염습하는 기구와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간단하고 검소한 것에 힘써 나의 뜻을 따르라.”고 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 경계를 두지 않았고, 친척을 대하거나 친구에 대할 때 늘 겸양하고 공손히 따랐다.
집안 자제의 옷차림이 바르지 않으면 감히 규문(閨門)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엄숙하기가 마치 조정의 법도와 같았다.
아, 참으로 성품이 효성스럽고 부지런하면서 모습이 진중하고 굳세지 않으면서, 이와 같이 잘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람들이 ‘무장(武將)의 명성에 유자(儒者)의 행실’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인데도 수명이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보다 훨씬 적어서, 식자(識者)들이 하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다만 내가 집안사람이서 그가 세상을 떠나고 큰 경사가 있음을 애석하게 여기겠는가? 천도(天道)가 정해진 것은 참으로 징험할 수 있다.
부인(夫人) 공산 정씨(公山鄭氏)는 학생(學生) 흥주(興周)의 딸이다. 병신년(1656) 1월 13일에 태어나 임자년(1672)에 시집와서, 계묘년(1723) 6월 16일에 막내아들의 흥해군(興海郡) 임지에서 공보다 19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공의 묘 왼쪽에 합장되었고, 남편을 따라 정경부인(贈貞敬夫人)에 증직되었다. 부인의 덕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음식 만들기 같은 집안일을 직접 주관하였다. 시어머니를 섬기는 데 한결같이 효도하는 마음이었다. 동서를 대할 때나 비복을 다스릴 때 각각 은혜와 의리를 다하였다. 빈손으로 가세를 일으켰으니 무릇 부인이 하기 어려운 것인데, 나머지 일도 한결같아 이웃이 모두 칭찬하고 감복하였다. 아들 셋, 딸 둘을 두었다.
장남은 바로 함녕군 찬신인데 절도사(節度使)에 거듭 임명되었다가, 지금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다. 찬신의 아들 태환(台煥)은 특별히 천거되어 남행선전관(南行宣傳官)으로 무과에 급제하였고, 내직(內職)을 거쳐 지금은 순천군수(順川郡守)에 임명되었다. 찬신의 서자(庶子)는 태엽(台燁)·태형(台烱)·태위(台煒)가 있다. 차남 재신(再新)은 가선대부(嘉善) 길주목방어사(吉州牧防禦使)이다. 재신의 계후자(繼后子)는 태소(台熽)이고, 서자(庶子)는 태욱(台煜)이다. 삼남 태신(泰新)은 가선대부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이다. 태신의 아들 태혁(台㷜)‧태정(台炡)이고, 딸 둘은 어리다. 딸 둘은 사인(士人) 최몽익(崔龍翼)과 이정구(李廷耈)에게 시집갔다. 최몽익의 아들은 경문(景文)과 희문(希文)이고, 딸은 이광재(李匡載)‧송익호(宋翼皓)에게 시집갔다. 이정구의 아들은 도징(道徵)이고 딸은 남익주(南益周)에게 시집갔다. 첩 소생 아들 필신(弼新)은 아들 하나가 있는데 태희(台熺)이다.
옛날 내가 막 젊었을 때 공이 자주 나의 아버지가 계시는 곳에 와서 자주 독서한 내용에 대해 묻고 힘써 행하기를 중하게 여겼다. 지금 30여년이 흘러 부형(父兄)과 장로(長老)들이 한 사람도 살아있지 않고, 공도 세상을 떠난 것도 묘소에 있는 나무가 한 아름일 정도로 지났다. 나도 역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으로 이룬 것이 없이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이에 공의 묘에 지문을 쓴다.
오호!, 슬프구나. 명(銘) 한다.
재주를관직에서펼친것이
才之施於官者
열에하나정도이고
惜一於十
그덕을누린수명이
壽之享其德者
50살에지나지않네
嗟半於百
네마리말(結駟)과붉은비단(襲緋:벼슬길)이
結駟襲緋
공의영광이되기부족하고
不足爲公榮
비석을세우고제사를지내도
樹石薦豆
공의명성에는부족하다
不足爲公名
상속자(冢嗣)가 나라의 간성(干城)이 되었으니惟冢嗣之作于城兮
공이살아있거나죽었거나가문제가아니었네
匪公之沒不沒也歟
저자손이이어져선조를계승함이여
伊胤屬之傳箕裘兮
장차공이후손의밥을받고받지못함이아니겠는가?
將公之食未食也歟
몸소수고롭게하여그후손을비추었으니
劬于躬而燾厥後兮
이치가어긋남이없고,
理不忒
그아름다움을찬양하여유택에묘지를묻으니
揚其美而藏諸幽兮
살핌이다함이없구나.
視靡極
숭정(崇禎) 기원후 두 번째 기미년(1739) 가을 재종제(再從弟) 행 현감(行縣監) 두익(斗益)이 삼가 짓다.